낡은 방송법의 비극⋯토종 OTT 혁신 발목 잡는다

“넷플릭스가 F1 레이싱카라면 토종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쌀가마니를 잔뜩 얹은 경운기다.”
국내 OTT 업계에서 최근 회자되는 자조다. 세계 콘텐츠 시장이 하나의 디지털 무대로 통합된 지 오래지만 한국 미디어 산업을 규율하는 법·제도는 여전히 20년 전 ‘코드 커팅(Cord-Cutting)’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에 멈춰 있다. 가장 큰 비극은 낡은 ‘방송법’ 프레임이 혁신의 발목을 잡는 ‘모래주머니’가 됐다는 점이다. 유통산업발전법이 오프라인 마트를 묶어 이커머스에 규제 차익을 몰아줬듯 현행 방송 규제 체계는 토종 플랫폼을 사전 규제의 감옥에 가둬놓고 글로벌 빅테크들에게 안방 시장을 통째로 헌납하는 역설을 낳고 있다.
22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현행 방송법과 IPTV법은 국내 사업자들에게 엄격한 사전 규제를 부과한다. 이용 요금을 올리려면 정부 승인이나 신고를 거쳐야 한다. 국산 콘텐츠 편성 비율을 맞춰야 하며 까다로운 방송 심의 규정도 준수해야 한다. 반면 전기통신사업법상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되는 넷플릭스, 유튜브, 디즈니플러스 등 해외 OTT는 이런 족쇄에서 자유롭다.
동일한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함에도 적용 법체계가 달라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셈이다. 그 사이 글로벌 플랫폼 넷플렉스는 계정 공유 제한과 요금 인상 등을 통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며 K콘텐츠의 과실을 따갔다. 국내 OTT는 요금 1000원을 올리는 문제조차 여론과 정책 환경을 고려해야 하는 처지다.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에서 투자 여력은 줄고 제작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방송과 OTT를 포괄하는 ‘통합미디어법’ 제정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수년간 방송사 지배구조 등 정쟁적 사안에 매몰돼 정작 산업의 사활이 걸린 법안 심의는 뒷전으로 밀어냈다. 부처 간 주도권 싸움과 이해관계자의 눈치 보기가 이어지는 사이 국내 미디어 생태계는 고사 직전에 몰렸다. 14년 전 유통법 도입 당시 제기됐던 ‘온라인 쇼핑으로의 전환 가속’의 경고가 묵살됐던 것처럼 미디어 시장에서도 ‘글로벌 플랫폼 독점’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는 정치 논리에 밀려났다. 규제의 명분은 시청자 보호와 공적 책임 강화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내 사업자의 경쟁 조건만 악화시켰다는 비판이다.
한 OTT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OTT는 국경 없는 속도전으로 시장을 장악하는데 우리 국회는 방송의 사후 심의와 사전 규제라는 과거의 유물에 집착해왔다”며 “규제 편익은 해외 기업이 누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 창작자와 플랫폼이 떠안는 구조를 방치하는 것은 입법부의 방기 아니었나”라고 비판했다.
결국 쟁점은 ‘선의의 규제’가 실제로 누구를 보호했는가다. 공공성을 앞세운 제도가 산업 현실과 괴리될 경우 시장의 역학은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 시청자 보호와 방송의 공적 책임을 내세운 규제들이 결과적으로는 국내 미디어 산업의 자생력을 갉아먹고 외산 플랫폼의 지배력만 강화한 꼴이 됐다. 유통법의 실패가 쿠팡이라는 공룡을 키웠듯 낡은 방송법은 넷플릭스라는 거대 포식자에게 한국 시장의 ‘레드카펫’을 깔아준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회전만 반복하던 통합미디어법의 논의가 드디어 시작됐다는 점이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최근 국회 업무보고에서 “현행 방송규제 중 실효성 낮은 규제를 재검토하고 OTT 등 신유형 미디어가 준수해야 할 필요·최소한의 규율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또 다른 OTT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낡은 규제의 모래주머니를 찬 채 글로벌 공룡과 싸우라는 것은 패배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면서도 “이번 통합미디어법 신설로 국내 OTT 업계의 역차별 해소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