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대로 복수 인증 거쳤어도 ‘명의도용 의심 정황’ 대응까지 봐
금융권은 비대면 거래 위축·정상 고객 불편 우려

비대면 금융거래의 책임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정해진 본인확인 절차를 밟았다는 사실만으로 금융회사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게 이번 판결의 핵심이다. 명의도용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다면 추가 확인에 나섰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러한 판단이 확산할 경우 비대면 대출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정상 고객의 불편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해 8월 명의도용 비대면 대출 사건에서 금융사가 대출 신청을 명의자의 의사에 따른 것으로 믿을 전자문서법상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히 제시했다.
대법원은 “본인확인절차가 당시의 기술적 수준에 부합하는 적정한 것이었는지, 관련 법령에서 정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 거래의 특성에 맞게 본인확인조치 또는 피해 방지를 위한 노력을 다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사건에서 보이스피싱범은 피해자 명의로 은행에서 9000만원을 대출받았는데, 은행은 운전면허증 진위 확인과 기존 계좌를 활용한 1원 인증, 휴대전화 본인인증, 공동인증서 인증, 신용정보 조회 등을 거쳤다. 대법원은 이를 토대로 은행이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다했다고 보고 대출 계약의 효력을 인정했다.
다만 대법원이 기술 수준과 거래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한 이후에도, 하급심에서는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의 비대면 실명확인 방안 준수 여부가 여전히 대출 효력을 가르는 핵심 근거로 쓰였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 민사5-2부(염기창 부장판사)는 지난해 11월 분실한 휴대전화를 사들인 일당이 피해자 명의로 A 은행에서 7100만원을 대출받은 사건에서 대출 효력을 인정하고 A 은행을 면책했다. A 은행이 비대면 실명확인 방안에 따라 복수의 확인 절차를 거쳐 본인확인 의무를 다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A 은행이 패소한 이번 판결에서도 비대면 실명확인 방안에 따른 복수의 본인확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은 동일했다. 다만 이번 재판부는 명의도용을 의심할 정황이 있었는데도 A 은행이 이에 상응하는 확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제시한 종합적 판단 기준과 궤를 같이해 ‘금융권이 정한 본인확인 절차를 거쳤다는 사정만으로는 상당한 주의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며 대출 효력을 부정한 것이다.
특히 명의도용자들이 영상통화 본인인증에 응하지 않았는데도 A 은행이 보안 강도가 더 낮은 1원 인증으로 본인확인을 진행한 점을 지적했다. 대출 직후 직원이 60대인 피해자를 사칭한 30∼40대 명의도용자와 직접 통화하고도 이를 걸러내지 못한 점도 판단 근거가 됐다.
이번 판결에 대해 금융권은 정해진 본인확인 절차를 이행한 금융회사에 결과적 책임까지 폭넓게 물을 경우 비대면 금융거래가 위축되고 정상 고객의 불편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들은 본인확인 절차를 보수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오히려 심사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민원을 받을 정도로 확인 기준이 엄격하다”며 “가이드라인상 복수의 인증 절차를 거치고 의심거래 탐지와 사후 검증 체계까지 작동하는데, 이를 모두 통과한 거래에까지 사후적으로 은행 책임을 넓히는 것은 현장에 상당한 부담”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융사가 고객의 휴대전화와 인증수단, 개인정보가 어떤 경위로 제3자에게 넘어갔는지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며 “정해진 본인확인 절차를 충실히 이행했는지보다 결과만으로 책임을 판단하면 비대면 거래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판결이 확산하면 은행은 소득·재직 증빙 기간을 늘리고 영상통화나 추가 대면 확인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며 “그만큼 정상 고객의 통장 개설과 대출 이용 절차가 길어지고 불편도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