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연구용역 보고서 "소액사건 등 특정 부분에서 예외 적용"
자료 보존의무 도입·소송대리인(변호사) 제재 신설 등 방안 제시

쿠팡발 정보유출 사고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한국형 ‘디스커버리(Discovery·증거 개시)’ 제도 도입를 위한 논의가 한층 무르익으면서 기업 관련 소송의 지형도에도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23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인하대학교 산학협력단(책임연구자 이준범 로스쿨 교수)은 최근 대법원이 발주한 ‘디스커버리 제도의 사회적 효용과 비용에 관한 연구’ 용역 결과 보고서에서 디스커버리 제도를 한국 실정에 맞게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사소송 전반에 원칙적으로 적용하되, 소액사건 등 특정 부분에서는 예외를 두는 게 바람직하다는 취지다.
디스커버리가 사회 전체에 미칠 효과와 비용에 관한 연구는 드물었던 만큼, 대법원은 이번 연구 결과를 제도 도입 논의의 중요한 근거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디스커버리는 소송에서 재판 개시 전 상대방이 가진 증거·자료를 강제로 공개시키는 절차다. 민사소송 진행에 앞서 각 당사자의 소송대리인(변호사)들이 주도해 사실관계를 다툰 뒤 법정으로 향하는 식이다. 사전에 증거·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디스커버리는 애초 국내 대기업들이 미국에서 특허 소송을 벌이면서 주목받았으나, 최근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 쿠팡 미국 본사는 정보유출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뿐 아니라 미국 주주들의 증권 집단소송까지 엮여있다. 해당 소송 모두 디스커버리로 윗선의 내부 자료가 공개에 따른 부실 대응 등이 드러날지가 관건이다.
국내에서도 디스커버리 도입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진행돼 왔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도입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국회에는 디스커버리를 골자로 하는 민사소송법·특허법·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법 개정안 등 10여 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대법원도 디스커버리 도입을 추진해왔지만,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이에 연구진은 디스커버리 도입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연구진은 디스커버리를 민사소송 전반에 적용하되, 예외를 두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경우 소송 당사자끼리 자료를 요구하다 분쟁이 발생할 때 법원이 개입하지만, 한국형 디스커버리 법안은 법원이 사전 통제를 하므로 사건 유형이나 소송물에 따라 적절하게 지휘할 수 있다고 봤다. 또 적용 사건을 제한적으로 열거하면 관련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국회 입법과정에서 예외 사건 유형 등을 정하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예외 사례로는 소액사건을 꼽았다. 소송목적 값이 3000만 원 이하인 사건의 98%는 적어도 당사자 한 명의 변호사가 선임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는데, 디스커버리에 대한 이해가 낮아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당사자 모두 소송대리인이 선임돼 있거나 디스커버리 절차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 허용할 수 있고, 소액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큰 이익을 주는 사건이라면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게 맞는다고 설명했다.
또 증권 관련 집단소송에서 대표당사자 외에 일반 구성원에게는 디스커버리 의무가 적용되지 않음을 개정안에 명시하라고 제안했다. 수천 명의 당사자들이 각각 자료 제출을 요구한다면 시간과 비용만 늘어나기 때문에 집단적인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하는 법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밖에 소송에서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료의 보존의무 도입, 소송대리인(변호사)의 자료 미제출 등에 대한 제재 신설, 문서제출명령에 따른 비용 부담 근거 명시 등 개정안에 담길 합리적인 의견도 제시했다.
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했다. 전우정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소송 구조는 차이가 있다. 당장 디스커버리를 전체 사건에 적용하면 엄청난 혼란이 생길 수 있다"면서도 "단계적으로 도입해 나름 시행착오를 거친 뒤 장기적으로는 전체 사건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소송이 본격화하기 전 단계에서 여러 가지 증거 제출을 실효성 있게 담보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며 "모든 사건에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건 아직 이른감이 있고, 기업에 의한 다수 당사자의 피해 등 쿠팡처럼 현재 문제가 되는 사건에는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