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 善(선)은 진정 한물 간 가치일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입력 2014-04-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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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잔 나쁜 남잘 좋아해 왜. 나쁜 남잔 나쁜 여잘 좋아해 왜. 그래서 난 너를 이렇게 사랑해. 근데 너는 이런 내 맘을 몰라 왜.’ 최근 발표된 2NE1의 ‘착한 여자’라는 곡이다. 노래가 말해주듯 요즘 착하다는 것은 어딘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차라리 나쁘다는 것이 쿨하고 세련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한때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줄곧 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가치로 세워지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드라마 속에서도 착한 남자보다는 나쁜 남자에 대한 열광이 더 두드러진다. ‘학교 2013’에서 이종석만큼 주목을 끈 김우빈은 ‘나쁜 남자’의 전형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다.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그는 무언가 꽉 막혀 있는 듯한 세상에 대한 속 시원한 울분 같은 걸 보여준다. 김우빈의 나쁜 남자 이미지는 ‘상속자들’을 통해 그 매력을 폭발시켰다. 최근 ‘사남일녀’ 같은 가족 버라이어티에 출연하고 있는 김우빈은 오히려 이 나쁜 남자 이미지로 고정되는 자신을 부담으로까지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사실 ‘나쁜 남자’라고 표현되지만 이들이 진짜 악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나쁘게 행동하고는 있지만 속내는 ‘상처받은 착한 영혼’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나쁘다’는 건 캐릭터의 능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파스타’의 이선균이나 ‘나쁜 남자’의 김남길처럼 재력이든 능력이든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심지어 나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쁘게 행동해도 멋있게 보일 수 있는 것. 즉 나쁘다는 건 성공한 자, 혹은 가진 자의 ‘자신감’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선의 가치가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세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착한 드라마’들은 독하디 독한 막장드라마들의 홍수 속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든 드라마가 되어가고 있다. KBS의 새 주말극 ‘참 좋은 시절’에 대해 ‘낯설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거꾸로 지금껏 우리가 얼마나 독한 드라마들에 중독되어 왔는가를 말해준다. 이전 동시간대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은 그 자극적인 설정과 전개 때문에 막장 논란이 쏟아져 나오면서도 꽤 높은 시청률을 가져갔다. ‘왕가네 식구들’의 자극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그래서 ‘참 좋은 시절’의 이 착함이 너무 밋밋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의 세컨드와 함께 가족을 이뤄 생활하면서도 싸우기는커녕 서로를 챙겨주기 바쁜 며느리와, 권위라고는 손톱만큼도 발견하기 어려운 자애롭다 못해 연민마저 느껴지는 시아버지, 자신처럼 살지 말라며 이 집에 맡긴 아들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사는 여인이나, 어찌해 갖게 된 아이들을 제 자식이라 못하고 동생이라 부르며 사는 그 여인의 아들 또한 그 밑바탕에는 따뜻한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오로라 공주’처럼 툭하면 작가의 손에 의해 인물이 죽어나가는 드라마와는 정반대다. ‘참 좋은 시절’에는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작품을 쓴 이경희 작가의 전작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였다. 이미 ‘고맙습니다’ 같은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이경희 작가는 선의 가치를 믿게 만드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마치 세상에 매력적인 ‘착한 남자’는 없다는 세태와의 정면대결을 벌이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참 좋은 시절’ 역시 마찬가지다. 주말극이고 일일극이고 할 것 없이 막장이 창궐하며 선의 가치보다는 악의 가치를 세련됨의 상징이나 되듯이 보여주는 요즘의 세태에 이 드라마는 어딘지 투박해 보여도 정감이 가는 ‘참 좋음’의 가치를 새삼 드러내준다. 선하다는 건 진정 한물간 가치가 아니다. 다만 난무하는 자극이 우리를 둔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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