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재벌개혁 압박에 엎드려 있던 재계가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다.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 이후 방향타를 고쳐 잡은 재계가 변화를 모색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특히 역할론과 관련해 질타를 받아온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전통시장 살리기 현장지도에 나서는 등 독자프로그램을 가동하며 반기업 정서 해소에 동참하고 있다. 재계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의 이같은 행보를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만은 않다. 오히려 진정 사회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즉, 재계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고, 다하려고 노력한다지만 그것은 수혜자가 아닌 공여자로서의 평가라는 것이다.
재계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19대 국회 개원 이전에 정치권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국회 개원 이후 예상되는 재벌개혁 공약의 입법화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고 대선 정국의 이슈화 부상도 희석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한다는 재계의 최근 행보가 정치권이 빼어들 재벌개혁의 칼날을 무디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접근법이 사회적 기대 수준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이 내건 재벌개혁의 핵심은 지배구조 개선과 독과점 개선이다. 재벌해체론을 내놓은 야당의 재벌개혁이 지배구조 개선에 맞춰져 있다면 여당은 독과점 개선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개혁보다는 개선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새누리당의 재벌개혁 공약도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근절 ▲대기업의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방지 ▲부당단가 인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 시스템상의 체질개선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에 재계도 최근 성과공유제 수용 등 과거와 달리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장애인과 저학력자 등 사회적 소외계층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채용 기획을 확대하는 등 그동안의 일회성 사회공헌 활동에서도 벗어나 지속가능한 사회적 책임 이행에 나서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개혁에 맞서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의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평가가 미흡하다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다”면서도 “그동안 정치권에서 제기됐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재계도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대안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의 폐단에만 주목한 정치권의 개혁 요구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재계의 온도 차이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의도에서다.
실제로 지난 18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초청받은 진보성향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는 어느 한 주장에 쏠렸다가 실망하고 다른 주장에 관심을 보이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보이고 있다”며 사회 지속 가능성과 경제 지속 가능성의 균형을 위한 해법으로 ‘사회적 타협’을 강조했다.
따라서 재벌개혁이라는 피할 수 없는 거센 풍랑을 만나 재계가 향후 어떤 역할과 행보로 정치권과 여론의 평가를 받을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