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개봉 30주년을 맞았다. 이 영화에는 오타루의 아름다운 설경이 있고, 죽은 연인을 애달파하는 자의 마음이 있으며, 잃어버렸던 첫사랑의 기억을 되찾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의 얼굴이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있다. 그는 첫사랑의 원형과도 같은 이미지로 영화 속에서 생동한다. 나카야마는 최근 영화 개봉 30주년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러브레터’가 첫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첫 장면에서 와타나베 히로코는 설산에서 조난으로 목숨을 잃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생각하며 일종의 유사 죽음을 시도한다. 설산에 누운 히로코는 눈을 감고 숨을 길게 참았다가 내뱉는다. 이후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츠키의 1주기 추도식이 열리는 마을로 터덜터덜 내려간다. 이츠키의 생명을 앗아간 설산과 숨을 참고 눈을 감는 행위가 죽음을 상징한다면, 사람들이 있는 마을과 숨을 내뱉고 눈을 뜨는 행위는 삶을 상징한다. 첫 장면에서 보이는 히로코의 행위로만 말하면, ‘러브레터’는 죽음에서 삶으로 가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죽음에서 삶으로 가려는 히로코의 궤적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죽은 이츠키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동명의 여자 동창생이다.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를 잊지 못해 졸업 앨범 뒤에 적힌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데, 실수로 그 편지가 죽은 이츠키와 이름이 같은 여자 동창생에게로 간 것. 그렇게 영화는 이미 죽고 없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살아 있는 두 여자가 편지로 공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여자 이츠키가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뒤늦게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알아차린다는 사실이다.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에게 그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한다. 여자 이츠키는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과거 남자 이츠키와 나눴던 감정이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타인의 요청에 의한 자기 진술을 통해 잃어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의 상대방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여자 이츠키의 입장에서 히로코가 실수로 보낸 편지는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알리는 일종의 부고였던 셈이다. 즉 여자 이츠키는 잃어버린 첫사랑을 되찾자마자 상실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죽음의 이미지는 영화 곳곳에 깔려 있다. 여자 이츠키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눈길을 걷다가 얼어 죽은 잠자리를 발견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얼음 속 잠자리는 죽은 아버지는 물론 죽은 이츠키와도 연결된다. 남자 이츠키가 책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서 대출 카드 뒷면에 그린 여자 이츠키의 그림 역시 죽은 잠자리의 이미지와 겹친다. 이 그림은 남자 이츠키가 죽은 후에야 여자 이츠키에게 전달된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이 도서 대출 카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보낸, 이 영화의 사실상의 러브레터인 셈이다.
이 기구한 운명의 로맨스 영화가 멜로드라마의 고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러브레터’가 사랑의 본질이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에 있다고 말하는 씁쓸한 영화는 아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없어도 그의 앞날을 열렬히 축원하는 것.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러브레터’가 이별을 통해 사랑을 말하는 방식이다. 헤어졌다고 그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설산과 첫사랑의 애틋함으로만 기억되는 이 영화는 이렇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관객들에게 전한다.
개봉 30주년을 맞은 ‘러브레터’는 관객들에게 ‘오겡끼데스까(잘 지내고 있냐)’라고 안부를 전하며 메가박스에서 재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