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에 자재조달 부담감 커져
파업 등 생산 차질도 빚을 전망
국내 산업계가 탄핵 정국 장기화 등 대내외적으로 커진 불확실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달러 강세 흐름이 나타나는 가운데, 비상 계엄과 탄핵 정국 여파로 시장 불안 요인이 더욱 커지면서 복합적인 위기를 겪을 처지에 놓였다.
8일 산업계와 재계 등에 따르면 탄핵 불성립 이후 정국 혼란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영향력 저하,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 대미 협상력 공백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탄핵 정국 장기화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위상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올해 인공지능(AI) 시장 개화와 함께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그 주역으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AI 시장의 ‘큰 손’으로 불리는 엔비디아에 HBM을 거의 독점 공급하고 있다. D램 시장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추격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선전하는 상황이다.
다만 정치 불안정이 이어진다면 우리나라에 대한 해외 기업과 투자자들의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국회에 계류된 법안도 처리가 요원하다. 국회에는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이 계류돼 있다. 탄핵 정국으로 이 법안은 당분간 논의 대상에서 뒤로 밀릴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공학과의 한 교수는 “(탄핵 정국 장기화 상황이 지속되면) 반도체 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외국 기업의 투자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라며 “인공지능(AI) 시대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며 우리나라 기업들은 투자를 이어 가야 하는데, 투자 적기를 놓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치적 불안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해 고환율이 지속되는 상황도 문제다. 트럼프발(發) 달러 강세에 더해 비상계엄 사태 이후 환율은 2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오르며 1440원을 웃돌기도 했다.
환율이 급등하면 원자재를 사들여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철강·석유화학·이차전지 기업들로서는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 국내 정유업계도 연간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 전량을 해외에서 달러화로 사들이고 있어 환율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구조다.
한 재계 관계자는 “내년도 신년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환율이 너무 흔들려서 계획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라며 “수출로 먹고사는 기업들 대부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환율 기조는 항공업계에도 크나큰 악재다. 항공업계는 항공기 리스비, 연료비 등 대부분 고정비용을 달러로 지출한다. 지난해 말 기준 대한항공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1% 오를 때 연간 외화평가손실이 약 300억가량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4분기는 전통적으로 비수기로 꼽히는데, 계엄 사태 이후 일부 해외 국가에서 한국을 ‘여행 위험 국가’로 분류하면서 여행객 수요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사실상 국정 동력을 상실하면서 대외 신뢰도 하락과 대미 협상력 공백도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이번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한 정부 간 거래(G2G) 산업 중 하나인 ‘체코 원전 수주’도 불안한 상황이다. 올해 7월 체코 정부는 남부 두코바니 지역에 1000㎿ 규모 원전 2기를 짓는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최종 계약은 내년 3월쯤 이뤄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본 계약이 취소되는 최악의 경우도 거론된다.
또 다른 기업들은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프로젝트, 3조 원 규모의 폴란드 오르카 프로젝트 입찰 수주도 준비 중이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3월을 목표로 하는 체코 원전 수주 본 계약을 앞두고 있다”며 “체코와 미국 정부의 협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 부분이 불확실해졌다”고 말했다.
내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대미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최대한 이른 시기에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현재로선 계획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 내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이를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는 법안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곧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선자가 IRA를 없애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당장 내년 상반기 계획이 불안하다”며 “대통령 탄핵이 계속 거론되는 상황에서 미국과 누가 대화해줄 수 있나”고 반문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탄핵 정국 장기화로 노조가 파업을 예고하면서 생산 차질을 겪을 우려가 커졌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금속노동조합 소속 현대차지부와 한국지엠지부는 5~6일 이틀간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을 시 이달 11일부터 무기한 전면파업에 나선다는 지침을 마련한 바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탄핵 정국에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경제 활동이나 시장 상황이 위축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라며 “장기적인 사업 계획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이고, 현재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도 대내외 리스크 가중으로 인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정치적 리스크로 인해 국가 전반에 대한 대외 신뢰도가 하락하면서 가뜩이나 약화한 (중소기업) 수출 경쟁력이 더 훼손하는 등의 피해가 있지는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이번 문제로 인해 환율이 1400원 중반까지 오르는 등 고착하는 모습으로, 수출 중소기업의 경우 채산성이 악화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또 하나는 대외 신뢰도 저하, 즉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어 “내수 부문에서는 어수선한 시국에 연말에 예정된 송년 행사 같은 게 취소할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보여 소상공인이 어려워질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