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중의 세상읽기] 애국심 마케팅

입력 2015-09-0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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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 한국정치문화원 회장·전 가천대 객원교수

제1차 세계대전이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소리 한 방으로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신물 나게 들었을 터다. 그런데도 가령 북한이 군사도발을 일으키면 무의식 중에 예의 그 사라예보 총성을 연상하게 되는 건 필자만은 아닐 듯하다. 우발적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이를테면 공황장애처럼 눌어붙어 있다.

지난번 지뢰 도발로 야기된 남북 간 군사대치에 상황에도 우리 국민이 의연히 대처했다는 뉴스에 난 동의하지 않았다. ‘의연히’라고? 차라리 다들 만성이 된 거다. 6·25한국전쟁 이래 남북 간 무력충돌은 말 그대로 다반사였다.

젊은 군인이 여럿 희생됐다. 불운한 일부 민간인들도 숨졌다. 김현희 등 KAL기 폭파범으로 인해 중동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돌아오던 근로자들이 떼죽음을 했고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유능한 관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도 애꿎은 병사 두 명의 다리가 결딴났다. 이 모든 국민의 희생이 따지고 보면 정부 측 ‘북한 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번 대응 방식도 못마땅하다. 박 대통령은 ‘애국심 마케팅’ 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애국심 마케팅? 순진무구한 민초들로부터 애국심을 끌어내 그걸 무기 삼아 북한 측 김정은을 상대로 말하자면 ‘치킨 게임’ 같은 걸 벌였다.

인류사 이래 전면전은 의도되지 않은 가운데 불붙은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슬기로운 국가 지도자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전쟁을 막아 국토가 초토화하는 건 물론 다수 인명의 살상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역사상 무수한 기록들이 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 건 무능한 통치권자들이었음을 이젠 국민들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되풀이하기 번거롭긴 하지만 지난번 남북 대치에서 득을 본 건 의외로 북측이다. 결국 남측의 패배 기록이 하나 더 추가된 꼴이다. 가령 지뢰 폭발에 유감을 표했다고 했을 뿐이지 그게 북측 소행이라고 합의문 어디에 기재돼 있는가? 북측은 처음부터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였다. 노회한 김양건의 얼굴이 줄곧 내 머리에 어른거렸다.

손익계산서를 작성해 보면 북측이 얻은 게 아주 많다. 우선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고, 5·24 대북 제재조치 해제에 이어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리란 기대이익이 발생했다. 우리는? 고작 이산가족 상봉 행사뿐이다. 도발의지 분쇄? 어림없는 소리다. 우린 오아시스의 신기루만 본 거다. 모두 김정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두 손 들었다고 환호하는데 왜 당신만 앙앙불락(怏怏不樂)인가? 당신 혹시 종북주의자 아닌가? 보수단체 사람들이 힐난할 법도 하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자들과 이른바 협상을 하게 되면 판판이 기만당하고 끝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일이 서구(西歐) 대 중국·옛소련 간 대치에서 빈번했다. 더 좀 냉철하게 우리 측 당국자들이 사고해야 함을 강조한다. 모두(冒頭)의 이야기로 돌아와 함부로 애국심이란 걸 흘리고 다녀서도 안 된다. 조선왕조 이래로 수백년에 걸쳐 백성들만 전란에 시달려 왔다. 군주 이하 지배계급은 늘 뒷전에 있었고 민초들의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우리는 눈 아프게 목격해 왔다.

국민들이 이제 눈을 더 크게 뜨고 이른바 지배층, 혹은 상류계층의 위선을 감시해야 할 터다. 또 불필요하리 만큼 값싼 애국심을 남발해서도 안 된다. 지난번 사태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대통령이 꼭 ‘임금’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체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왜 저리도 대통령의 권한이 무한대인지를 회의하게 되었다. 독선처럼 무서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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