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대학원생
100일가량 된 조카를 돌보는 누나와 부모님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조카가 잘 먹고 잘 자는 등의 지극히 간단하고도 동시에 원초적인 생리 현상들만 잘해도 엄청난 예쁨과 칭찬을 받는 모습을 통해 나도 과거엔 저렇게 과도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연계적으로 “왜 지금은 다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와 조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본연적인 서로의 연령 차이에 따르는 행동양식이고, 그 중심에는 기대치라는 요점이 존재한다.
기대라는 양상을 떠올려 보면 그 기대라는 것의 양적, 질적 가치는 본연적으로 외적 존재와의 비교가 된다.
비교 대상일 수 있는 타자들이 취할 수 있는 양식의 범위와 깊이가 처음엔 상대적으로 같은 지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쉽게 그 대상의 우위와 하위를 비교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간의 양이 쌓이면서 비교할 수 있는 부분들은 점차 늘어나고 깊어지게 된다.
그래서 현재 조카와 나 사이에 칭찬 받는 것에 대한 빈부격차가 발생했던 것이다. 즉, 조카는 비교 대상이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속해 있고 나는 수많은 비교 대상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양극화를 향해 달려가는 현실에서는 중간계층이 증가해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다수의 비교 대상이 추가 유입되기 때문에 칭찬의 빈부격차는 한층 심각해지고 추가적으로 비교 의식은 심화되어 끝이 없는 비교가 시작된다.
따라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사회를 바라지 않는 이상 의미 없는 비교를 멈추고 시간과 감정을 소비해가면서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한다. 사람은 모두에게 배울 점이, 예쁜 점이, 그리고 칭찬받을 점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