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대응 넘어 구조 변화"…산업지도 바뀐다

미·이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산업계가 '탈중동 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쟁 초기에는 물류 차질과 유가 급등에 대한 단기 대응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원자재 조달선과 물류망, 생산 전략 전반을 재설계하는 구조적 변화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자동차·항공·정유업계는 중동 지역 지정학적 리스크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자 공급망 다변화와 비상 대응 체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가장 민감하게 움직이는 곳은 AI 반도체 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반도체 생산 확대에 맞춰 헬륨, 브롬화수소 등 산업용 가스와 핵심 소재 수급 안정성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이미 일정 수준의재고를 사전 확보하고 있으며 기업별로 복수의 조달 경로를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현재까지 생산 공정에 직접적인 차질은 발생하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AI 반도체 경쟁이 기술력뿐 아니라 공급망 안정성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시대에는 공장 가동이 하루만 멈춰도 피해 규모가 막대하다"며 "원가보다 공급망 안정성이 더 중요한 경영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기아는 현재까지 직접적인 생산 차질 없이 전쟁 국면을 버텨냈지만 하반기에는 물류비와 원자재 가격 상승 부담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중동은 현대차·기아의 주요 수출 시장 중 하나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물류망이 불안정해지면서 완성차 운송과 부품 조달 비용이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철강과 알루미늄 등 원재료 가격 변동성 확대도 수익성에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항공업계는 이미 전쟁 장기화의 영향을 체감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은 일부 중동·유럽 노선의 중동 상공을 우회하는 노선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비행시간 증가에 따른 연료비 부담이 커졌지만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해운·물류업계 역시 비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HMM과 현대글로비스 등은 선박 안전 확보와 운항 경로 조정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쟁보험과 비상 항로 확보, 공급망 리스크 관리 역량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정유업계도 변화에 나서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과 남미, 아프리카산 원유 도입 확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비용 부담이 늘어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전쟁 100일의 의미가 단순한 물류 차질을 넘어 산업 구조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갈등에 이어 중동 전쟁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효율성 중심 공급망에서 안정성 중심 공급망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가장 저렴한 공급처를 찾는 것이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위기 상황에서도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경쟁력이 되고 있다"며 "중동 전쟁 100일은 한국 기업들이 공급망 전략을 다시 쓰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