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관세에 전세계 초토화…생산기지 옮길 곳이 없다 [공급망 전쟁의 서막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서 외쳤던 ‘너는 해고야(You are fired)’가 현실이 됐다. 확성기로 경고만 날리던 ‘관세 부과’가 전 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실제 ‘발사(fire)’된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를 놓고 ‘뒤집힌(inverted) 세계’라고 표현했다. 뒤집힌 세계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2018년 시작된 미중 무역갈등,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에 이어 한국기업들은 관세발(發) 공급망 전쟁 소용돌이에 다시 휘말렸다. 공급망은 인증과 같은 절차적인 부분을 새롭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재편이 쉽지 않다. 생산라인 구축 등에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집행된다. 본지는 미국 관세 정책에 따른 기업들의 공급망 현주소를 분석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베트남 46% 등 주력 생산기지 초고율 관세
미국 현지 생산 확대ㆍ공급망 재편 불가피
기업 직간접 수출 위축…매출감소ㆍ고정비 부담
글로벌 생산ㆍ조달ㆍ물류 구조 재검토 분기점

원본보기
▲4대그룹 주요 기업 핵심 생산지. (이투)

미국의 관세 정책은 기업에 공포 그 이상이다. ‘자유무역 시대의 종말’로 인해 글로벌 생산 분업을 주도한 기업들에 막대한 비용 계산서를 가져다줄 수 있어서다. 국내 기업이 다수 진출한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도 높은 관세 폭격을 맞았다. 삼성·LG전자, 현대자동차그룹 등 글로벌 거점을 보유한 대기업들은 물론 현지 조립·가공 생산을 맡고 있는 수백 개 중견·중소 부품사들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6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삼성·SK·현대자동차·LG 등 4대 그룹의 해외법인은 1910곳에 달한다. SK(638곳), 삼성(563곳), 현대차(425곳), LG(284곳) 등의 순이다. 대부분 규제와 물류, 인건비 등을 고려해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등 해외 현지에 공장을 세웠다.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의 주력 생산기지인 베트남에 46%의 초고율 상호관세를 책정하면서 삼성·LG전자 등 가전기업은 초비상이다. 지난해 삼성이 베트남에서 생산해 미국 등으로 수출한 스마트폰·가전 제품 규모는 544억 달러(약 80조 원)에 달한다. 삼성 스마트폰의 50% 이상이 베트남에서 만들어지고 대부분 물량은 미국으로 수출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삼성과 LG가 생산지를 다변화했다는 점이다. 삼성의 TV, 모니터 등은 멕시코와 베트남, 브라질, 헝가리 등 세계 각 지역에서 제조된다. 스마트폰은 베트남, 인도, 브라질 등에서 생산된다. LG는 TV 등 디스플레이 제품을 멕시코와 폴란드에서 제조하고 세탁기 등 가전은 미국과 태국, 중국 등에서 만든다. 자동차 관련 부품은 베트남, 중국, 오스트리아에서 생산한다. 당장 멕시코가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된 만큼 가전기업들은 멕시코 지역 공장에서 생산량을 늘리며 대응할 수도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관세를 포함한 생산지별 제조원가를 고려해 최적의 생산지를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도 영향권에 놓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적지 않은 반도체 물량이 중국 공장에서 생산된다. 중국에 34%의 상호관세가 부과되는 만큼 해당 지역 공장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중국에서 생산한 반도체 대부분은 인도와 베트남 등에 있는 고객사로 공급되기 때문에 삼성과 하이닉스가 곧바로 관세 폭탄을 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트업체들이 높은 관세를 안게 되면 반도체 회사들도 연쇄 간접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세트사가 가장 먼저 관세로 인한 타격을 입겠지만 결국 원가 부담을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떠안게 되는 수순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관세 부과를 예고한 점도 부담이다.

원본보기
▲미국의 ‘상호관세’ 발표를 하루 앞둔 2일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차량이 세워져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시각 3일 오전 5시(현지시각 2일 오후 4시) 전세계 각국을 상대로 즉시발효를 전제로 한 상호관세를 발표한다. 우리 수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 시장에 큰 장벽이 생기는 셈이다. 이미 품목별 관세가 부과됐거나 예정된 자동차, 철강재 등은 예고된 이중관세에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기업은 미국에 생산공장을 이미 두고 있어 관세 후폭풍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SK온의 경우 포드, 현대차 등 고객사와 합작법인(JV) 형태로 조지아주, 켄터키주, 테네시주 등지에 신규 공장 4개를 추가 건설하고 있다. 문제는 양극재·음극재·분리막 등 배터리 소재 조달이다. 미국의 배터리 소재 수입 중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4%에 달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에 들어가는 부품, 심지어 소재까지도 가급적이면 미국 내에서 조달하는 전략을 모색 중”이라고 설명했다.

석유화학업계는 미국 내 제조시설을 구축하는 식으로 관세를 피하기 어려워 더 난감하다. SK케미칼 관계자는 “지금은 일단 내부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영향을 파악 중”이라며 “생산법인 이전 등 구체적 논의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SK케미칼의 생산법인은 국내와 중국에 있다.

자동차업계는 상호관세를 피했지만, 관세 회피를 위해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고민이다. 신영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한 자동차 중 수입산 비중은 현대차가 68%, 기아 64%로 양사의 수입차 의존도는 미국 시장 평균 50% 대비 높은 수준이다. 두 업체의 미국 판매 중 한국산 비중은 현대차 67%, 기아 45%로 파악된다. 현대차그룹은 미국내 세 번째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로 미국 내 생산 비중을 절반 수준 가까이 올리며 타격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자동차 부품사들의 상황은 심각하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은 “미국의 관세 부과로 국내외 판매 및 수출 감소가 우려되는 가운데 이로 인한 부품업계의 피해가 수조 원에 이를 것”이라며 “특히 미국의 관세부과로 현지 생산 확대와 공급망 재편이 불가피해지면서 국내 부품기업의 직·간접 수출이 위축되고 매출감소와 고정비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법무법인 세종은 “우리 기업이 해외에 보유한 제조기지가 국가별 개별관세 대상국에 포함돼 있어 공급망 재편이 예상된다”며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생산·조달·물류 구조 전반에 대한 전략적 재검토가 필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