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1일. 까치의 설은 어제지만 우리의 설은 오늘이라는 그 설날. 설이 다가오면서부터 한국인들은 분주해지는데요. 약 한 달 전부터 진행되는 기차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죠. ‘연어 티켓팅’이라고 불리는 귀향길 표 쟁취전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벌이는데요. 그나마 이번에는 설 연휴가 길어 나아진 편이라고 하지만 25일부터 28일(토~화) 하행선 티켓은 전멸이죠. 티켓팅에 실패했다면 대체편이나 자가용 등을 구하거나 역귀성 행렬이 등장하는 전 국민 대이동의 날입니다.
TV에서는 특집 프로그램을, 혹은 휴일을 맞은 즐길거리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요. 이를 잡기 위한 ‘설 이벤트’도 성행하죠. 설을 맞아 차례상 물가부터 세뱃돈 적정금액, 설날 선물, 설날 떡값, 설날 성과급 등 꽤 큰 현금이 오가는데요. 또 그 정이 담긴 선물은 택배를 통해 ‘택배 대란’이란 단어도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큰 날’입니다.
그야말로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 불리는 이 설이 골치 아픈 이웃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요.바로 “그 설은 네 설이 아니라 내 설이다”라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심지어 도둑으로 몰아가기까지 하는데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에서 진행한 음력설 기념행사에 또다시 중국 네티즌이 흥분했는데요. 월트디즈니컴퍼니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행사 영상 때문이었죠.
색동 남녀 한복을 차려입은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영상 상단과 우측에 각각 ‘음력설(Lunar New Year’)’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한글로 적혀있었는데요. 한글과 한복도 음력설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은 거죠.
중국 네티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음력설이 아닌 ‘중국설(Chinese New Year)’이라는 댓글을 대거 달았는데요. 심지어는 “한국이 우리 설을 훔쳤다”고 주장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중국의 질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요. 매번 설마다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죠.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요. 지난해 이맘때도 ‘디즈니 파크’, ‘디즈니랜드 리조트’ 등이 SNS 계정을 통해 설 명절 관련 홍보 글을 올린 바 있는데요. 당시 디즈니 캐릭터들은 중국풍의 옷을 입고 ‘음력설’을 축하했지만, 여기서도 ‘중국설’이라는 주장을 했죠.
이런 상황에도 디즈니랜드는 ‘음력설’로 표기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음력설’을 기념하는 것이 중국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력설은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각자 독특한 관례에 따라 기념하는 ‘명절’인데요.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여러 아시아 국가와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전통 명절로 기념하죠. ‘음력설’ 명칭 또한 나라마다 다릅니다. 한국은 ‘설(설날)’, 중국은 ‘춘절’, 베트남에서는 ‘뗏’이라고 부르죠. 중국설이라는 표현은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인데요.
이에 2023년 유엔이 제78차 유엔 총회 회의에서 음력설을 ‘유동 휴일(Floating Holiday)’로 지정했을 때도 ‘Chinese New Year’이 아닌 ‘Lunar New Year’로 표기됐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뉴욕주가 음력설을 공립학교 공휴일로 지정했는데요. 한국계인 론 김 뉴욕주 하원의원 등이 관련 법안을 추진한 결과로 해당 법에 또한 설날이 ‘중국설’이 아닌 ‘아시아 음력설(Asian Lunar New Year)’로 표기됐습니다. 또 미국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통신사 AP통신 또한 사내 스타일북에서도 ‘중국설’ 대신 ‘음력설'’ 표현을 사용하라고 권고하고 있는데요.
전통적으로 태음력을 사용하던 국가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새해 첫날로 기념했는데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종 황제가 을미개혁(1896년)으로 ‘양력’인 ‘그레고리력’을 돌입하고 양력 1월 1일을 새로운 설날로 공표하면서 전통력인 음력설이 ‘옛날의 설날’이라는 뜻의 ‘구정’으로 불리며 밀려나 버렸는데요. 해방 이후에는 ‘양력설’을 강조하며 ‘음력설’의 성묘와 세배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정서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85년부터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 1989년부터는 ‘설날’로 변경하고 연휴 기간까지 늘렸죠. 그만큼 오랜 기간 놓칠 수 없는 고유 명절인 셈인데요.
중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설이 중국의 태양 태음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게 이유인데요. 동아시아 다른 국가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중국설’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 주장에는 한국에 대한 질투심(?)도 바탕이 됐는데요. 한국의 대외 문화적 영향력 확대에 적개심을 가진 것이죠. 아시아 문화를 주도해 왔다고 자부하는 중국이 뒤로 물러난 모양새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건데요. 이를 두고 서호주대에서 문화간 커뮤니케이션과 소비자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메기 잉 장 부교수는 CNN에 “최근 수년간 고조된 민족주의 흐름이 격렬한 반응의 잠재적 요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민족주의로 디즈니처럼 ‘음력설’로 표기한 기업들이 피해를 받고 있는데요. 영국박물관이 한국 관련 행사 소개와 함께 ‘Korean Lunar New Year(한국 음력설)’라는 표현을 썼다가 중국 네티즌들의 거센 항의로 게시글을 지웠고요. 미국 중앙정보국(CIA) 또한 세계 각국의 기념일을 소개하는 홈페이지 게시물에서 ‘설날(Sul Naal), 한국의 새해 명절’이라고 게재했다가 중국인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거꾸로 나이키와 애플이 온라인 계정에서 아시아권 최대 명절인 설을 ‘중국설(Chinese New Year)’로 표현해 한국 네티즌의 질타를 받기도 했죠. ‘음력설’을 표기했던 유엔 또한 ‘음력설 기념 우표’에는 ‘중국설(Chinese New Year)’로 적어 비판을 비팔 수 없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설 명절 연휴를 맞아 20개국 22개 재외 한국문화원에서 각국 현지인들과 함께 세배, 떡국, 한복, 전통놀이 등 다양한 우리 설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데요. 중국 네티즌의 억지 주장 속 한국문화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새해는 새해일 뿐 민족의 정서와 기념 방법은 다름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을 설득할 방법이 없는데요. 한국의 전통 의상과 음식까지 “한국이 훔쳐갔다”고 우기는 그들에게 코웃음 치기로 끝내는 건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죠. ‘억지 주장’을 이겨낼 ‘정공법’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