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대내외 악재를 딛고 한국 경제가 다시 반등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기업 이사가 ‘주주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 대신 ‘주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상법 개정이 현실화한다면 기업 사냥꾼에게 경영권 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2일 글로벌 신용평가사 S&P(스탠다드앤푸어스) 글로벌은 이날 발간한 ‘한국 기업 신용도 흐름 : 2025년 어렵다’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내년 신용도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신용등급 하방 압력이 우려된다고 이같이 밝혔다.
S&P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국내 기업의 ‘부정적’ 신용전망은 18.4%로 작년 말 5.3%보다 13.1%p(포인트) 늘었다. 지난해 ‘긍정적’ 전망이 2.6%였던 것과 달리 ‘긍정적’을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신용등급 BBB+인 LG화학, LG에너지솔루션, BBB인 한화토탈에너지스 모두 ‘부정적’ 신용전망이다. ‘BBB’로 강등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BBB-의 포스코, SK이노베이션, SK지오센트릭도 ‘부정적’으로 평가 중이며, 두산밥캣(BB+)은 ‘부정적’ 워치리스트에 등재 중이다.
S&P는 “한국 시장은 내수 둔화, 경기민감업종의 비우호적인 수급 상황, 정책 불확실성 등으로 인해 많은 기업들의 영업환경이 악화되고 부정적 등급전망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며 “이차전지, 철강, 화학은 실적 부담이 증가하는 반면 완성차 업체는 현금 창출 능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 했다.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은 공격적인 설비투자에도 차입금이 지속적으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북미와 유럽의 전기차 수요가 정체된 영향이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의 채무 부담이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S&P는 “LG에너지솔루션의 FCF(잉여현금흐름)은 부정적일 것인 반면, 중국의 배터리 제조사 CATL은 강력한 FCF를 통해 순현금을 계속해서 늘려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유·화학과 철강 부문도 중국발 공급 증가로 인해 판매 단가는 하락하고, 수요 약세가 이어진다는 관측이다. 국내 기업에서는 포스코홀딩스의 신용등급 하방 압력을 우려했다.
S&P는 “한국 정유·화학사와 철강사들은 마진 스프레드 압력에 놓여 신용전망이 어려울 것”이라며 “낮은 철강 수익성과 대규모 배터리 투자는 포스코홀딩스의 부채 부담과 신용도 하방 압력을 키운다”고 말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어려운 영업환경 속에서도 하이브리드, 전기차 경쟁력을 기반으로 양호한 실적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기아의 하이브리드 전기차 제품 경쟁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의 견조한 수요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인공지능(AI) 수혜가 커질 것으로 봤다. S&P는 “AI 칩 수요는 내년에도 견조할 것”이라며 “SK하이닉스는 HBM의 선구주자로 피어기업인 삼성전자, 마이크론을 뛰어넘는 실적을 보일 것”이라고 했다.
내년 한국 신용도 모니터링 핵심 지표로는 △화학·철강 산업의 중국 수급에 따른 가격 상승과 롤마진 축소 △내수 둔화 속 기업 투자 감축 △미국 트럼프 당선에 따른 정책 불확실성을 꼽았다.
무디스도 올해에 이어 내년까지 한국 기업들의 신용도 하향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무디스의 션 황 연구원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미 공화당의 의회 장악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칩스법’(반도체지원법)이 폐지될 시 한국 기업 신용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션 황 연구원은 “폐지 가능성이 높은 상황은 아니지만 행정명령 등을 통해 보조금 예산 집행이 제한될 가능성도 있다”며 “LG에너지솔루션, SK온은 IRA에 근거한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관련 수익이 영업이익 비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큰 상황인데 IRA 관련 혜택이 유의미하게 축소된다면 신용도에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지원법 역시 폐지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만약 폐지·축소가 진행될 경우 미국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국내 반도체 업체들에는 추가적인 자금 소요가 생길 수 있다”면서 “다만 배터리 업체들보다 미국 설비 비중이 크진 않고 재무 유연성도 뛰어나 신용도에 주는 영향은 통제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학계 한 관계자는 “지속되는 내수 부진과 글로벌 환경악화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지 않고 버텨 온 것은 주력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덕분이다”면서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는 상법개정 등이 현실화한다면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