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정철학 분명히 할 때 흔들림없고
정파적 책략에 쉽게 넘어가지 않아
요설(妖說)이 요설(饒舌)을 낳는 사이 근본은 잊힌다. 요사스러운 수작들로 쓸데없는 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근본적인 일은 방치된다는 뜻이다. 요즘 한국 정치판에 맞는 말이다.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 이후만 봐도, 국가적 관심사가 될 수 없는 주변적 사안들을 놓고 여야 정치인들이 온갖 험담, 궤변,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말싸움 난장판 속에서 정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국정의 거시적 지향점과 구체적 의제는 논외로 밀려있다.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이 격노하며 수사 외압을 넣었는지 아닌지. 이에 대한 특검법을 통과시킬지 말지. 영부인의 과거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청문회를 어떻게 진행할지. 영부인이 명품백 수수와 관련해 보낸 일련의 메시지를 여당의 사령관 격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무시한 게 잘한 건지 아닌지. 일부 검사들에 대한 탄핵을 진행하는 게 야당 최고지도자의 사법 방탄용인지 아닌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원 청문회가 정당한지 아닌지. 이런 사안들이 여러 갈래의 험한 설전을 낳으며 정국을 때론 얼어붙게, 때론 불타게 하고 있다.
이런 사안들이 과연 국정의 방향과 내용에 직결되는가? 공통되게 국정운영 방식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것도 핵심 인물들의 개인적·사적 행위에 기인한 것들이다. 한국이라는 복잡한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어떤 의제로써 이끌어갈지 공적 결정에 관련된 게 아니다. 물론 국정운영 방식도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이유는 국정운영 방식의 부적절함(‘국정농단’)에 있었다. 그러나 요즘 정치무대 위 핵심 인물들의 행위가 일탈적이었다고 해도(아직 논란거리지만), 사적 행위로부터 시작된 국정운영 방식의 논란이 블랙홀처럼 정치판을 다 빨아들이고 극심한 갈등으로 몰아넣어 국정의 방향과 의제라는 근본은 방치되고 있다는 데 사안의 심각함이 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외풍에 흔들린다. 정치의 근본 뿌리는 국정의 방향과 의제다. 어떤 정책으로 민생을 도울지, 어떤 제도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불필요한 사회 갈등을 줄일지, 외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 국민의 안위를 지키고 풍요를 이룰지, 불안에 빠진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거릴지. 이런 난제를 극복할 공적 방향과 의제를 찾는 게 정치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부실하다 보니 사적 행위를 둘러싼 요설과 정쟁이 정치의 틀을 뒤흔들고 있고,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근본을 더욱 망각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치는 근본을 세워야 한다. 국정 방향과 의제가 전면에 나와 여야 정치인들의 주된 담론을 이뤄야 한다. 이건 당연히 무대 위 정치인 모두의 공동 과업이다. 그럼에도, 가장 큰 책임은 현실상 국정 주도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국정철학을 일관된 초점으로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뚝심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국정 방향과 의제로 논의를 집중시키게 될 것이고, 국민의 관심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릴 것이다. 그래야 주변적, 사적 일들이 아무리 요사스럽게 불거져도 정치를 다 삼켜버리지는 못한다.
대통령과 측근은 억울해할지 모른다. 국정 방향과 의제를 제시했으나 야당과 언론은 이를 무시하고 주변적·지엽적 사안들만 놓고 물어뜯는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명료한 국정철학에서 체계적으로 나온 국정 방향과 의제라면 쉽게 가릴 수 없고, 그에 입각한 정치라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정파적 책략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날 여야 관계는 물론 여당 내의 참담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정치의 근본이 부실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제라도 정치의 근본인 국정철학, 국정 방향과 의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일관되게 부각해야 한다. 그것이 요설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