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말더듬 이겨낸 ‘국민에 대한 책임’

입력 2024-06-0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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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남 영화평론가ㆍ계명대 교수

<아카데미 수상작 ‘킹스 스피치’, 톰 후퍼 감독, 2010년>

1936년 1월 20일 영국 왕 조지 5세가 사망했다.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승계했으나 미국 출신 이혼녀 월리스 심슨 부인과의 스캔들로 인해 왕위를 포기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이로써 같은 해 12월 11일, 차남 앨버트(요크 공작)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지 6세다. 그러니까 1936년 영국은 세 명의 왕이 보위에 있었던 특별한 해였다.

앨버트는 국왕에게 부과된 책무, 왕관의 무게가 너무나 버겁게 느껴져 한사코 피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저 가족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는 삶을 원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국정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 나아가 사회불안 장애로 비쳐질 여지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부 국민에게는 앨버트 왕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국의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불신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스캔들로 인한 왕실의 권위 추락과 갑작스러운 퇴위로 대영제국의 분열 위기가 고조됐다. 한편으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쟁 위협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조지 6세에게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왕실을 만들고 권위를 이어가야 하는 것에 더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해야만 하는 책무가 부과됐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2022년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부친인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데이비드 세이들러 각본에 톰 후퍼 감독, 콜린 퍼스의 명연기로 아카데미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앨버트는 병약한 체질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아버지인 조지 5세의 혹독한 훈육방식과 유모의 은밀한 학대가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왼손잡이, 안짱다리 교정 과정에서의 스트레스로 열등감과 심리적 고통이 배가됐다.

유소년기에 그가 겪은 이와 같은 여러 어려움에 대해 왕실의 엄격한 분위기는 누구에게도 털어놓거나 위로받을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고 말을 더듬게 됐다. 영화는 이러한 부분을 강조해 캐릭터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촉진하며 성장 드라마를 완성한다. 그는 왕이 돼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 운명에 맞서 자신과의 싸움을 힘겹게 펼친다. 그는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왕실과 국민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의 도움으로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왕으로 거듭난다.

그는 대중 선동의 달변가 아돌프 히틀러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고 국가총동원 체제를 발동해야 했다. 군주의 권위와 정통성을 드러내고 국민의 동참을 이끄는 담백한 연설을 한다. 그는 독일의 런던 대공습 시기에도 버킹엄궁을 떠나지 않았고 왕비와 더불어 죽을 위험을 넘기기도 했다. 전쟁 시기 내내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저항의 상징이자 구심점이 돼주었고 윈스턴 처칠과 더불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영화를 통해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국왕이나 대통령은 한 나라의 헌법기관이며 국가 제도의 정점이다. 따라서 최고 지도자가 행하는 모든 발언은 한 개인의 사적 발화행위가 아니라 그가 가진 권력과 리더십의 공적 체현이다.

그만큼 엄밀함과 정제된 언어표현이 요구된다. TV와 같은 오늘의 시각 영상 매체 앞에서는 몸짓언어 역시 공감각적으로 어필하는 것이어서 더욱더 진중해야 한다.

우리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통속어와 한정어는 지지자들에게 굵고 짧게 감성적이고 강렬하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천박함이나 말실수로 받아들여질 여지 역시 있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돼 그 자신을 향하게 될 수 있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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