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세이] '어떻게 보낼 것인가'보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

입력 2023-10-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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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영국 런던 남부 시드넘의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는 말기암 환자 에디가 침대에 누워있다. 오른쪽 앞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그의 배우자인 리타 씨와 손녀 젬마 양, 딸 로레인 씨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시드넘(영국)=정유정 기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참여자가 이달 200만 명을 넘어섰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5년 8개월여 만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만 연장하는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생전에 직접 기록하는 문서다. 죽음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도입됐다. 2018년 2월부터 시행됐다.

이는 ‘주체적 죽음’을 준비하는 수단 중 하나다. 정부가 내년 도입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사전장례의향서도 같은 맥락이다. 사전장례의향서는 장례·장사방식을 사전에 결정해 기록하는 문서다. 서울 강동구는 5월 중앙정부보다 먼저 ‘사전장례주관 의향서 관리사업’을 시행했다.

한국의 장례문화에선 ‘떠나는 방식’보다 ‘보내는 방식’이 강조된다. 연명의료 결정, 장례·장사방식 결정 등은 고인이 아닌 자녀 등 유가족의 몫이다. 유가족은 ‘도리’를 중요시하는 유교적 전통 내지는 사회적 시선에 얽매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하고, 삼일장 후 화장·봉안으로 대표되는 가장 일반적인 장례·장사방식을 택한다. 이는 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가족에게 부담을 지운다. 유가족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진료비나 장례비용을 부담한다.

‘죽음의 주체성’ 강화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좋은 대안이다. 고인의 의사대로 연명의료 여부, 장례·장사 절차를 정하게 되면 유가족은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 특히 개인 차원에선 이미 장례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가 시작됐다. 일반적 장례·장사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본지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7월 1일부터 7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p)), 응답자의 절반 이상(50.3%)은 희망하는 본인의 장례 기간으로 1~2일을 답했다. 장사방식에선 43.1%가 자연장을 꼽았다.

고인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한다고 해서, 장례·장사방식을 간소화한다고 해서 고인의 존엄성이 훼손되거나 애도의 의미가 퇴색하진 않는다. 중요한 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다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사전장례의향서만으론 부족하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죽음을 준비할 계기가 지속적으로 제공돼야 한다. 그 수단 중 하나가 ‘죽음 교육’이다. 해외 선진국에선 ‘사망학(Thanatology)’이 대학의 교양필수 과목으로 편성된 사례가 흔하다. 정규 교육이 아니더라도, 장례·장사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공유될 필요가 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죽을 준비를 한다는 게 아니다. 언젠가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게 됐을 때, 존엄하게 삶과 작별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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