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무늬만’ 킬러규제 혁파 그치지 않아야

입력 2023-09-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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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의 자동차에는 반드시 운전사와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6.4㎞/h, 도심에서는 3.2㎞/h로 제한한다. 기수는 낮에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에서 차를 선도해야 한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1865년 증기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마차 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이른바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적기조례)’의 내용이다. 이 법안의 정식 명칭은 1861년 만들어진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기관차 도로법)’이며, 적기조례는 두 번째 개정안에 속한다.

이 법안은 1878년 또 한 차례의 개정을 거치는데 종래의 적기와 기수는 폐지했으나 말과 마주친 자동차는 정지해야 하며,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를 내뿜지 않도록 했다. 적기와 기수의 폐지만 놓고 보면 일견 규제를 개선한 것으로도 비치지만, 실상 증기자동차를 아예 운행하지 못하도록 한층 강화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해당 법안은 1896년까지 약 30년간 시행된 세계 최초의 도로교통법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시대착오적인 규제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곤 한다. 영국이 산업 혁명의 발원지로서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하는 등 다른 나라보다 앞서갔음에도 이 법안으로 인해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에 빼앗겨서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규제를 없애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해왔다. 규제 개선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봇대 대못을 빼겠다’다며 규제 개선을 주창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를 ‘손톱 밑 가시’에 빗대 빼내겠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적기조례를 거론하면서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규제 개선의 행보는 이어지고 있다. 규제 혁신을 위한 최고 결정기구로 대통령이 의장, 국무총리를 부의장으로 하는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신설했고 관계부처, 학계, 경제단체 등의 추천을 통해 규제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민간 중심의 협의체인 경제 규제혁신 TF도 만들었다.

윤 대통령은 최근 들어 규제 개선의 고삐를 더욱 바짝 죄고 있다. 지난달 말 있었던 4차 규제혁신전략회의에선 투자의 결정적 걸림돌이 되는 것을 ‘킬러 규제’라 정의하고 “우리 민생경제를 위해 킬러 규제가 빠른 속도로 제거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단지 입지 규제나 ‘화관법’ 등 환경 규제, 외국인 인력 활동 등의 고용 규제 혁파를 주문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중기부가 중소벤처 업계에서 건의한 1193개 과제 중 올해 하반기 중점 개선할 중소벤처 분야 150대 킬러 규제 과제도 선정했다. 인증 판로와 환경, 사업화와 신기술, 보건의료, 인력, 금융, 현장 애로 등 범위도 방대하다. 그만큼 중소벤처 업계 전반에 걸친 각종 규제로 경영 애로가 상당했음을 반증한다.

관건은 규제 개선 과제를 성공으로 이끌 정부, 공무원 조직의 의지와 혹여 이로 인해 발생하게 될 부작용의 최소화다. 설익은 개선 과제는 사회 갈등을 더 키울 수 있다. 기후위기 등 환경 분야에 걸친 규제에 관한 여야, 시민사회의 진영 논리가 그러하다.

윤 대통령의 말마따나 규제 개선은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뜻을 하나로 모아도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은 경제위기 상황이다. 진영의 이익보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이라는 대의를 목표로 혜안을 모아주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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