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대폭 축소되면서 과학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공교롭게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국가슈퍼컴퓨팅본부가 전기료 부담으로 지난달 말까지 대용량데이터허브센터(GSDC)를 50% 축소 운영하면서 과학계의 불만이 상당하다. 예산 삭감은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장기적 위기가 될 거란 지적이다. 정부가 발표한 R&D 분야 내년 예산은 25조 9000억 원으로, 올해 31조 1000억 원에서 5조 2000억 원이나 줄었다. 감소율이 16.6%다.
31일 과학기술 업계에 따르면 전국과학기연구전문노동조합, ETRI 연구자 모임,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카이스트 대학원 총학생회,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 등은 내년도 R&D 예산 삭감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을 준비하기 위해 1일 긴급 회동에 나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가 발표한 2024년 편성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과기부 예산은 18조3000억 원으로, 올해보다 6000억 원 줄었다. 전체 R&D 예산은 25조 9000억 원으로 올해보다 16.6% 삭감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산 나눠 먹기, 이권 카르텔을 언급하면서다. 과기부는 ‘나눠주기’식 사업, 성과 부진 사업을 구조조정해 비효율성을 걷어낸 결과라고 설명한다.
예산 부족의 문제는 이미 예고됐다. KISTI가 운영하는 GSDC의 일부 장비는 지난달 21~25일 닷새 간 평소의 50%로 축소 운영됐다. 전기 요금 부담이 늘면서다. 연간 70여 편에 달하는 국내 SCI급 논문이 나오는 데 기여한 아시아 1위 데이터센터를 정상 작동하기 어려웠던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현실이다.
내년은 더 문제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조승래 국민의힘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KISTI의 내년 예산 역시 28.1%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KISTI는 줄어든 예산에도 차질 없이 슈퍼컴퓨터와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삭 국가슈퍼컴퓨팅본부장은 “정부 예산 안에서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 최우선적으로 컴퓨터를 운영하는 쪽에 돈을 몰아준 상태”라고 말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역시 28.6%, 누리호 발사의 성공 주역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2.8%, 한국천문연구원 28.1%, 한국전자통신연구원 26.7%, 한국화학연구원 24.7%, 한국과학기술연구원 21.5% 규모로 예산이 축소됐다. 이에 연구 노조 등을 중심으로 “정치적 목적과 수사에 종속된 과학 기술 정책의 말로” 등에 비유하며 연일 반대 성명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과학계에서는 R&D 예산 삭감은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어확 전국과학기연구전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은 “R&D 예산이 깎이면 출연연이나 연구기관이 연구를 열심히 하더라도, 과기부의 예산이 삭감된 만큼 과제를 따오지 못하기에 결국 인건비가 문제가 된다”며 “사실상 정부가 구조조정 하라고 말하지 못해도, 인건비를 찾지 못해서 석박사 후 졸업생이나 정규직 등의 일자리도 문제고, 자연스레 구조조정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과기부는 출연연 예산 삭감에도 내년 인건비는 올해 수준으로 유지되기에 단기 연구과제 등 수주 부담은 크게 높아지지 않을 거란 입장이다. 기관 간 협력을 지원하는 통합예산이 1000억 원 반영된 만큼 연구 환경 조성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