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익명을 원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겉으로는 크레딧시장에 훈풍이 불고 있지만, 누구 하나 만기를 넘기지 못할 경우 자칫 ‘도미노 도산’이 생길 수 있다”라고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몇몇 건설사나 증권사로 제한된 유동성 불안이 이번엔 산업계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는 걱정이 다시 고개를 든다. 특히 대외 환경 변화에 취약한 일부 업종이나 중소·중견기업은 흑자 여부와 상관없이 공포에 휩싸이는 분위기다.
한전과 시중은행발 구축효과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지난해 32조6000억 원의 적자를 낸 한전은 돈줄을 마련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오는 6월이면 은행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완화 조치도 끝난다. 금융당국은 레고랜드발 시장 불안의 여진 속에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까지 터지자 금리 불확실성 및 시중 자금경색 상황 등을 막기 위해 LCR규제정상화를 유예했다.
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순발행을 이어오던 은행채는 이달 들어 발행 폭을 확대하고 있다. 전날까지 4월 은행채 발행액은 9조2800억 원이다. 이대로면 지난달 발행액(10조6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로 시행된 은행채 발행 한도 규제가 지난달부터 125%까지 완화된 영향이다.
은행채는 연말까지도 대규모 만기도래 물량이 쌓여 있다. 올해 은행채 만기도래액은 164조6900억 원 수준으로 이 중 약 122조 원 규모의 만기가 3분기까지 몰려 있다.
시장에서는 6월로 끝나는 LCR규제 정상화 유예 조치에 주목한다.
특히 한국은행이 8월부터 현재 70%인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을 단계적으로 인상키로 하면서 우려는 더 크다. 은행은 보유한 고유동성자산 중 일정액을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으로 한국은행에 제공한다. 이는 LCR 하락 요인이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8월부터 제공비율이 80%로 인상되면 5조 원 정도의 고유동 성자산이 빠져나갈 수 있다”면서 “그 결과 은행은 5조 원 정도의 고유동성자산을 채워넣기 위한 재원 마련 목적으로 은행채 발행을 늘릴 유인이 있고, 이 물량이 한전채 물량과 합쳐질 경우 하위등급 크레딧의 구축효과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PF대주단 협의체 가동에 따른 부담도 있다. 부동산PF 연착륙 대책이 본격화하면 공사채 발행을 늘려야 한다. 매각·청산 대상 사업장에 공여된 브릿지론 매입을 위한 자산관리공사의 1조 원 규모 부실채권(NPL)펀드 조성, 미분양주택 매입을 위한 LH공사의 자금조달 필요성 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특례보금자리론 흥행에 주택저당증권(MBS) 발행 물량도 시장에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A증권사의 채권운용역은 “국채를 포함해 초우량물 발행이 단기간에 집중돼 금리 상승과 스프레드 확대가 우려된다”고 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월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AA등급 이상의 미매각률은 0.6%에 그쳤지만 A등급은 26.7%에 달했다. 4월 들어 회사채 수요예측에 나선 GS엔텍(GS글로벌 보증·신용등급 A), 쌍용C&E(A), 콘텐트리중앙(BBB), 푸본현대생명보험(A), KCC건설(A), 등은 예정된 발행 물량을 채우지 못했다.
반면, 포스코퓨처엠(AA-)의 1500억 원 규모(3년 1000억 원·5년 500억 원) 공모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예측에는 총 1조600억 원이 몰렸다. 한온시스템도 1500억 원어치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총 4950억원의 주문을 받았다.
강승연 DS투자증권 연구원은 “1분기 회사채 발행액은 전년 동기 대비 16.6% 증가한 8조100억 원 규모”라면서 “당초 축소될 것으로 기대됐던 한전채의 발행물량이 전년을 웃도는 현상이 이어지자 한전채발 수급 부담에 따른 채권시장의 불안감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석유가격이 오르면서 한전채의 약세가 심화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우려가 되는 상황”이라며 “다른 이슈들과 함께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