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현 퍼셉션 대표
처음 연락을 받고 “탄소중립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나의 걱정에 담당 학예사는 이렇게 답했다. “전시 관련 모든 활동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산정해 보면서 이 문제를 산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앞으로의 실천방법에 대해 관련 분야와 함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입니다. 있는 그대로 고백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생각을 가시화하고 구현하는 것,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와 그 결과물’로 디자인을 정의하고, 불편을 개선하고 일상의 즐거움과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점점 더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관점의 필요와 사람들의 경험욕구 진화로 디자인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데 반해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탄소 발생의 주범’이라는 공격도 동시에 받고 있어 죄의식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주변을 봐도 예민한 감각과 사회적 감수성을 지닌 디자이너들이 많고, 실제 무엇을 만들어내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역할과 책임에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치면서 매력적인 경험을 주는 디자인이 뭘까 매번 어려운 숙제를 풀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로 미해결로 남는 일이 부지기수다.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에 개개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알고 있지만 실제 행동은 다르다. 왠지 친환경 생활은 불편하고 예쁘지 않거나 비싸거나 혹은 지금 나의 행동이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체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실천을 미룬다.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의 입장도 비슷하다. 탄소감축을 비롯한 기후위기 대응이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객이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하니까’, ‘친환경 노력에 드는 시간과 비용 대비 효과 예측이 어려워서’ 등이 그 이유다. 재화의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체 라이프사이클을 살피고 관여하는 이해관계자들이 일의 모든 과정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탄소감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라이프 트렌드 2023’(김용섭, 부키)에서 제안한 ‘과시적 비소비’라는 키워드가 반가웠다. 가치 추구와 경험 욕구의 타협이 가능할 것 같아서다.
지난주 오픈한 코오롱 래코드([www.instagram.com/recode\_])의 10주년 전시 중 ‘우리의 죄’라는 작품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우리의 죄는 ‘디자인을 너무 많이 한 것’, ‘커피를 매일 세 잔 이상 마시는 것’, ‘용량이 큰 파일을 만드는 것, ‘예술을 공부한 것’… 등 벽을 가득 메운 속죄의 고백 맨 아래 ‘우리의 죄는( )’이라는 빈 칸이 있었다.
모든 인쇄물을 디지털로 전환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면 되는걸까. 디지털 소외 계층 등 또다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예술이나 디자인, 미술관 등은 인류 생존에 있어 부수적인 친환경의 대척점에 있는 활동 그 뿐일까. 아름다움의 추구와 새로운 영감으로 인한 정서적 가치는 정말 필요 없을까.
인류에게 닥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기존의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창의성을 모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주입식 교육이나 선전 선동으로 어려운 행동의 변화에 다른 동기부여가 필요할 것이다.
인지과정에 강한 영향을 주는 ‘시각’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이 일이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지’ 늘 각성할 필요가 있겠다.
토요일 저녁 미술관에 모인 여러 영역의 청중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할테니 미술관도 디자이너도 논의의 자리와 창의적 대안 제시를 계속해 달라 응원했다. 처음의 걱정과 부담은 함께하는 힘이 커질수록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갈 수 있겠다는 의지로 바뀌었고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안다고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진짜 죄를 저지르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