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학교식물원 원장·신구대학교 원예디자인과 교수
이렇게 대부분의 식물들이 활동을 멈추고 겨울잠을 자는 바람에 겨울을 맞은 식물원은 다른 계절에 비해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온실의 식물을 보러 오거나 카페에서 차 한 잔과 함께 고즈넉한 식물원을 즐기는 손님들이 차분한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주말 저녁 즈음이 되면, 꽃 대신 조명으로 정원을 장식한 겨울 식물원의 또 다른 모습을 보러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오십니다. 이분들이 ‘꽃빛 축제’라는 이름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겨울 동안 식물들과 식물원은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내면적으로는 다른 모습들이 많습니다. 식물들도 식물원도 이 시간 동안에도 많은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년생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은 한 번 추운 겨울을 경험한 다음인 2년째입니다. 이때 이년생 식물에게는 한 번 저온을 경험하는 것이 꽃을 피우기 위한 꽃눈 형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루로 내어 많이 먹는 밀 중에는 10월쯤 씨앗을 뿌리고 다음 해 6월쯤 수확을 하는 종류가 있습니다. 이런 밀을 ‘겨울형’이라고 하는데, 이 겨울형 밀을 봄에 파종하면 잎은 잘 자라지만 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겨울형 밀도 꽃눈이 생기기 위해서는 겨울의 저온을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온대지방 식물들의 꽃 피우기에 겨울의 낮은 온도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꽃을 피우는 일 외에 식물의 생장에도 겨울의 낮은 온도가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식물원에서 보전하고 있는 층층둥굴레라는 식물이 좋은 예입니다. 지금은 해제되었지만 과거에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보전을 위해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던 식물입니다. 이 식물은 땅속줄기가 아주 길게 자라고, 그 땅속줄기를 잘라 심으면 새로운 식물체로 잘 자라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특성을 활용해서 대량으로 층층둥굴레를 증식하는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연구 결과 잎이 다 진 늦은 가을에 땅속줄기를 잘라 심어서 겨울을 넘긴 경우가 봄철에 잘라 심은 경우에 비해 훨씬 더 식물체로 잘 자라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겨울을 지내야만 꽃이 핀다든지, 겨울을 지낸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것은 겨울 동안 식물체 내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저온 자극을 통해서 식물체 내에서 어떤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물질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호르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이나 물질의 실체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식물원도 식물을 닮았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겨울을 지내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시 올봄을 준비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새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필 봄이 왔을 때 그 식물들을 돌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그 식물들을 보러 올 손님들을 맞이할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직장,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삶이 어려운 겨울이라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일도 해야 하겠지만,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추운 겨울을 열심히 견뎌야 화려한 봄이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지금 혹시 추운 날씨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겨울을 겪은 우리에게 분명히 따뜻한 봄이 올 것임을 믿고 함께 힘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