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하는 시간] 겨울 시작에 봄을 준비한다

입력 2019-12-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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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일 신구대학교식물원 원장·신구대학교 원예디자인과 교수

얼마 전에 첫눈이 왔다고 하는데 저희 식물원이 있는 곳은 날이 궂을 때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겨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식물원의 낙엽수들은 잎을 떨어뜨렸거나 잎이 붙어 있어도 모두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풀들도 이미 녹색 잎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온실 속의 식물들만 상큼한 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식물들이 활동을 멈추고 겨울잠을 자는 바람에 겨울을 맞은 식물원은 다른 계절에 비해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온실의 식물을 보러 오거나 카페에서 차 한 잔과 함께 고즈넉한 식물원을 즐기는 손님들이 차분한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주말 저녁 즈음이 되면, 꽃 대신 조명으로 정원을 장식한 겨울 식물원의 또 다른 모습을 보러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오십니다. 이분들이 ‘꽃빛 축제’라는 이름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겨울 동안 식물들과 식물원은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내면적으로는 다른 모습들이 많습니다. 식물들도 식물원도 이 시간 동안에도 많은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년생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은 한 번 추운 겨울을 경험한 다음인 2년째입니다. 이때 이년생 식물에게는 한 번 저온을 경험하는 것이 꽃을 피우기 위한 꽃눈 형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루로 내어 많이 먹는 밀 중에는 10월쯤 씨앗을 뿌리고 다음 해 6월쯤 수확을 하는 종류가 있습니다. 이런 밀을 ‘겨울형’이라고 하는데, 이 겨울형 밀을 봄에 파종하면 잎은 잘 자라지만 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겨울형 밀도 꽃눈이 생기기 위해서는 겨울의 저온을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온대지방 식물들의 꽃 피우기에 겨울의 낮은 온도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꽃을 피우는 일 외에 식물의 생장에도 겨울의 낮은 온도가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식물원에서 보전하고 있는 층층둥굴레라는 식물이 좋은 예입니다. 지금은 해제되었지만 과거에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보전을 위해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던 식물입니다. 이 식물은 땅속줄기가 아주 길게 자라고, 그 땅속줄기를 잘라 심으면 새로운 식물체로 잘 자라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특성을 활용해서 대량으로 층층둥굴레를 증식하는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연구 결과 잎이 다 진 늦은 가을에 땅속줄기를 잘라 심어서 겨울을 넘긴 경우가 봄철에 잘라 심은 경우에 비해 훨씬 더 식물체로 잘 자라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겨울을 지내야만 꽃이 핀다든지, 겨울을 지낸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것은 겨울 동안 식물체 내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저온 자극을 통해서 식물체 내에서 어떤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물질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호르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이나 물질의 실체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식물원도 식물을 닮았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겨울을 지내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시 올봄을 준비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새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필 봄이 왔을 때 그 식물들을 돌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그 식물들을 보러 올 손님들을 맞이할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직장,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삶이 어려운 겨울이라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일도 해야 하겠지만,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추운 겨울을 열심히 견뎌야 화려한 봄이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지금 혹시 추운 날씨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겨울을 겪은 우리에게 분명히 따뜻한 봄이 올 것임을 믿고 함께 힘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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