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기업지배구조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입력 2019-07-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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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

‘철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담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철학은 곧 현실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성향을 결정하고 생각으로 구체화해 결국 현실에서 의견과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의결권 자문사에도 철학은 중요하다. 대개 연구원들이 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할 때 사안의 찬반 여부는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라 결정하고, 더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경우 세부 가이드라인에 따른다. 이때 일관성 있는 원칙이 핵심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문사만의 철학이 존재해야 한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균형감각’을 가장 중요시한다. 지배구조 문제들은 논리와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필드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경영권과 주주권,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균형적으로 판단하자는 기조다.

한 헤지 펀드 관계자와의 미팅에서 특정 주주총회 사안을 두고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당 연구소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이다. 의결권 자문사는 주주가 고객이니 주주가치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서로 철학이 달라 생긴 일이다. 펀드의 성향이나 기간,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쌍방의 이익을 모두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견해가 달라진다. 필자는 ‘주주가치’를 중심으로 주총 안건을 판단하되 ‘기업가치와 동반성장’하는 게 모두에게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실무적으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답을 찾기 힘든 배당 안건이 좋은 예다. 일반적으로 배당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배당은 기업 총수의 지분율과 지배력, 주주에 대한 마인드, 기업의 자산과 사업 효율성, 승계 상황을 엑스레이처럼 드러내곤 한다.

2015년 롯데쇼핑 정기 주주총회 당시 회사는 1주당 2000원의 배당안을 제시했다. 전년도 주당 1500원보다 30%나 증가한 금액이었다. 안정적 사업을 영위하는 한국 대표 그룹 핵심 자회사의 이익 대비 배당이 10.8%에 불과했고 ROE 3.4%, 유보율도 1만%를 초과해 보유 자산 대비 효율성도 떨어졌다. 연결기준 회사의 순자산은 17조5439억 원인데, 시가총액은 8조5970억 원으로 절반 수준이었다. 장부상 시가로 평가되지 않은 알짜 부동산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실제 기업가치 대비 시가총액의 차이는 훨씬 더 컸다. 당시 부채와 투자, 대주주의 상황까지 고려해 당 연구소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주주가치 열위로 판단한 것이다.

2019년 현대자동차의 배당 안건은 정반대였다. 현대차 이사회는 실적악화에도 불구하고 1주당 3000원의 배당을 유지했다. 이익 대비 전년도의 27%에서 71%로 증가한 배당금이었고, 2023년까지 약 45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향후 약 1조 원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상태였으므로 주주환원에 대한 의지도 충분했다.

당 연구소는 찬성했다. 구글차, 무인차, 친환경차 상용화에 직면한 자동차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배당보다는 ‘투자’를 늘려서 기업가치와 주가를 상승시키는 것이 주주에게도 더 큰 이익이라고 판단해서다. 반면, 엘리엇은 당시 회사가 약 9조 원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근거로 1주당 약 7배인 2만1967원, 총 5조8295억 원의 배당금을 주주제안으로 제시했다. 실적 부진으로 주가가 저조하므로 유휴자산의 배당을 통해 ROE를 높여 주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투자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45조 원 투자를 위해서는 5년간 매년 9조 원이 필요하므로 유휴자산으로 보기도 어려웠다. 기업의 장기 성장성은 주가에 먼저 반영되므로 투자는 주주에게도 중차대한 문제다. 당 연구소는 이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고 엘리엇의 주주제안은 부결됐다.

시장효율성 이론으로는 기업가치가 곧바로 주주가치에 반영돼야 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경영권과 주주권은 힘의 균형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한국은 대체로 주주권이 열위에 있다. 적어도 기업가치와 주주가치가 함께 성장해야 자본시장도 지속 가능하다. 사안에 따라 역동적 균형을 추구해야 할 일이다. 결국 철학의 문제다.

▲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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