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의 세계경제] 베네수엘라와 칠레의 차이

입력 2018-07-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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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대표적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인 ‘신자유주의’를 다시 듣게 되어 의아했다. 용법상 긍정적 의미보다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정부와 여당은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과거 신자유주의 정책의 적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최저임금 인상과 ‘재벌 혼내기’와 같은 독자 브랜드 정책을 밀어붙이던 정부가 집권 1년 반 만에 갑자기 과거 타령을 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인다.

근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자영업자들의 부정적 반응과 식자(識者)들의 비판적인 평가가 쏟아지면서 이에 대응하는 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당 지도부는 최저임금 상승에 따른 애로를 호소하는 소상공인 대표들을 ‘재벌 앞잡이’라는 과격한 표현으로 힐난할 정도로 자신들의 입장을 확신하는 모양새다.

신자유주의는 필자를 쓴웃음 짓게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와 같이 ‘1+1’으로 자주 언급되던 것이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이다. ‘워싱턴 합의’ 역시 부정적 맥락으로 쓰였다. 미국의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십년 넘게 중앙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다 그때쯤 한국에 온 필자는 이 ‘1+1’에 관한 질문을 자주 들었다.

“미국 물 오래 먹은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알 게 아니냐”라는 기대와 달리 아는 게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얼마 전 영어로 된 경제학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교과서적 해석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중남미) 국가들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탄생한 용어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당시 과다한 재정지출과 방만한 통화정책으로 높은 인플레이션, 외채 부담과 채무 불이행 등의 문제를 겪었고, 그만큼 위기가 자주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IMF는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 공공부문 민영화, 그리고 경제의 대외 개방 확대를 골자로 경제구조 개혁을 하라는 일종의 기술적 지원 조건을 달았다. 위기를 겪었던 국가들의 사정을 보면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지만 이런 조치에 불만이었던 기득권 세력, 노조, 그리고 좌파성향의 지식인들은 이런 조건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이라고 입을 모아 항의했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 협상이 진행되던 당시 일부 관심 있는 사람들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담당 업무나 연구 분야가 라틴아메리카와 무관했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불안했던 1980년대 말 한국에서는 이념적 논리나 논쟁에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발(發) 신자유주의 비판을 해당 국가들의 사정과 무관하게 심각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현재의 모습을 보자.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비판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나라가 베네수엘라이다. 그 나라는 현재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 총체적 위기의 수렁에 빠져 있다. 초(超)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를 10만분의 1로 낮추는 개혁을 추진한다고 한다. 동시에 현재 워싱턴의 주인인 트럼프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무슨 ‘주의(主義)’를 신봉하든 관심이 없고 더더욱 ‘워싱턴 합의’ 따위는 없다.

반면 상당히 굴곡진 현대사를 겪은 칠레는 이제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다. 칠레는 2010년 남미에서 유일하게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종식 후 다양한 정당들이 협력해 20년간 통치하며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고 낳은 결과이다. 2006년까지 6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사회당 소속의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의 다음 설명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건실한 경제정책은 좌파나 우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실한 경제정책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묵은 칼을 꺼내 든 정치인들은 이 두 나라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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