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인문경영] 법, 만만하지 않다

입력 2017-03-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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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법(法)대로 하자.” “법대로 하라.” 당신은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막다른 구석에 몰려 악에 받쳐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혹은 법이란 ‘구석’을 믿고 강한 자가 빈정거리는 강한 말로 들리지는 않는가.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서 ‘법대로’라는 말에 대한 통념은 부정적이다. 논리로 포장한 삭막함 혹은 합리를 가장한 폭력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항, 법의 융통성, 유연성을 강조한 해석은 한자 法을 파자해 풀이하는 것이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자로 되어 있다. 즉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 풀이다. 며칠 전 손석희 jtbc 사장은 “정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법(法)이라는 한자도 물(水)이 흐르는(去) 형상에서 유래됐다.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르고 질서에 순응해야 정의가 세워진다”고 말한 바 있다. 나름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와 연관해 한 말이었다.

과연 그럴까. 법은 ‘물이 흐르는 대로’라는 뜻일까? 이는 법(法)의 자원(字源)을 보지 않고 현재의 글자만 가지고 잘못 풀이한 것이다. 오늘날 法은 삼 수(氵)와 갈 거(去)로 구성되었지만 이는 후대에 와서 단순화된 글자다. 원래 글자 모양은 법(灋)으로 생겼다. 즉 삼수변 옆에 해태 치(廌) 글자가 하나 더 있었다. 해태(해치)는 바른 마음과 곧은 태도를 상징하는 신기한 동물이다. 생김새는 큰 것은 소만 하고, 작은 것은 양만 하며, 기린과 유사하다. 온몸에는 짙은 검은 털이 나 있고, 두 눈은 아주 밝고 빛난다. 이마에는 통상적으로 뿔이 하나 나 있으며, 속칭 ‘독각수(獨角獸)’이다. 그 속성은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외뿔로 들이받는다고 한다. 각각 선악을 주장하는 양측의 말을 들어보아 옳지 않은 쪽을 물어뜯거나 뿔로 들이받아버렸다고 한다. 중국 요황제 때 고요(皐陶)라는 신하가 법과 정의를 관장했다. 그는 옥사를 다스릴 때,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해치로 하여금 결정하게 했는데 공정한 법 집행에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수(氵), 치(廌), 거(去)의 조합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첫째는 물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공정한 마음으로 해태가 악을 제거한다, 둘째, 해태가 악을 제거하고, 물같이 맑고 공정한 사회를 구현한다. 셋째는 물에서 해태가 튀어나와 악을 없애고 홀연히 사라진다 등이다. 해석상 약간의 차이는 있다. 법의 기본요건은 공정한 마음, 엄정한 실행, 그럼으로써 정의 구현을 목표로 한다는 점은 대동소이하다. 결론적으로 법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는 결코 만만하지도, 완만하지도 않다. 결코 흐르는 대로가 아니다. 엄정, 공정한 잣대로 추상같이 처벌하는 응징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문화의 법에 대한 관념 역시 다르지 않다. ‘법(Jus)’과 ‘정의(Justitia)’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영어의 ‘정의(Justice)’는 ‘just’, 즉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준에) 딱 맞게’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로마어로 유스티티아(Justitia)라 불리는 정의의 여신을 보면 왼손엔 천칭(저울)을,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다. 여신의 눈에는 눈가리개가 덮여 있다. 칼과 저울, 눈가리개에 담긴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정의의 여신이 처음부터 칼, 저울, 눈가리개의 3종 세트를 다 갖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칼만 들고 있다가 저울, 그리고 눈가리개를 갖춘 모습으로 점차 진화되었다. 최초의 정의의 여신상은 고대 그리스의 ‘디케(Dike)’상이었다. 당시 디케상은 눈을 가리지 않고 칼만 쥐고 있었다. 여신상이 저울을 들기 시작한 것은 중세부터다. 법의 엄격한 집행만을 강조하던 시기를 넘어 이제 민중들이 공정함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정의’의 기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다. 초기엔 칼 같은 집행만이 강조되었다. 점차 여기에 부가해 법리적 기준에 대한 논거 주장에서 천칭이 등장했고, 그것만으로 미흡해 외부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내면의 눈으로 보라는 바람을 담아 안대까지 채우게 된 것이다. 칼이 실행이라면, 저울은 이해관계의 균형을, 눈가리개는 공평무사를 상징하는 뜻을 담고 있다. 동양의 해태나, 서양의 정의의 여신 유스타치아나 ‘공정한 정의’ 와 엄정한 실행이 공통이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법의 효용은 국민을 구속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 욕구나 성급함, 또는 무분별함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도록 지도하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울타리가 보행자의 길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보행자가 제 길을 갈 수 있게 세워진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10일 헌법재판소의 박 대통령 파면 선고 후 정국이 심상찮다. 일각에선 “사법적 탄핵 결정을 탄핵해야 한다”며 불복 입장을 보이고 있다. 탄핵을 지지했든 반대했든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법치를 살리는 길’이다. 법은 패거리를 가르는 가두리가 아니라 통합의 울타리로 기능해야 한다. ‘법대로 하라, 하자’가 더 이상 단말마의 슬픈 비명이나, 위협적 비아냥이 아닌 ‘합리적 주장’이 되는 시대를 만들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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