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43. 평강공주

입력 2017-02-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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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을 남편으로 선택한 내조의 여왕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평원왕(재위 559~590년)의 딸이다. 평원왕은 평강왕이라고도 하였는데,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평강왕의 딸이라는 점에서 유래된 것이다.

평강공주의 남편은 온달이다. 외모가 볼품이 없고 가난했으며 재주 또한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구김 없이 밝은 마음씨와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극진한 효심뿐이었다. 평강왕은 툭하면 우는 어린 딸을 놀렸다. “저렇게 만날 시끄럽게 울어대니 번듯한 대장부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천상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구나.”

울보 공주는 어느새 혼인할 나이인 16세가 되었다. 평강왕은 혼인할 집안으로 고구려 5부의 귀족 중에서도 상부에 속하는 고 씨 세력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이자 왕에게 대적했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꾸십니까? 일반 사람들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데 왕께서 헛된 말을 하시면 되겠습니까? 지금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따르지 않겠습니다.”

왕을 거역한 공주, 아버지에게 반발한 딸은 쫓겨났다. 평강공주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내야 했다. 일단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달고, 온달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겨우 찾아간 온달의 누추한 집에는 눈먼 노파가 있었다. 그리고 공주가 자신과 혼인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는 온달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온달과 혼인할 수 있었다.

평강공주는 재물의 교환가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금팔찌를 팔아서 농토와 집, 노비, 소와 말, 각종 기물 등을 갖추었다. 사치품이었던 장신구를 실질적 효용가치를 지닌 항산(恒産)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집안 경제를 안정적으로 꾸릴 기반을 마련한 공주는 온달에게 민간이 아닌 나라의 말을 사오라고 당부하였다. 종자는 좋으나 약하고 병들어서 팔게 된 나라의 말을 사서 건강하게 키워냈다. 그 말은 온달의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때가 왔다. 매년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왕과 신하들이 사냥을 하고, 사냥을 한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온달은 기른 말을 타고 참가하였는데, 남들보다 앞서 달리고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단연 돋보였다. 왕이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이상히 여겼다. 이후에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가 요동을 공격하였을 때 온달은 많은 공을 세웠다. 왕은 그제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고 인정하며,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후 온달은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사를 행하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하니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 평강공주는 신분의 벽을 넘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을 진 여성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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