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의 터닝포인트] 언어공해 부추기는 예능 자막

입력 2016-01-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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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뉴미디어부 차장

최근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인기 드라마가 막을 내렸습니다. 누구에게나 남아 있는 아련한, 그래서 살짝만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지는 감성을 제대로 겨냥한 드라마였습니다. 덕분에 적잖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극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흥밋거리도 많았습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만나게 될, 미래의 남편을 찾아내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지요. 드라마가 전개되는 가운데, 드라마 밖에서는 갖가지 신조어도 속속 생겼습니다. 극 중(또는 실제) 배우 이름을 가져와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라는 줄임말이 온라인을 가득 메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경한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종종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우리말, 우리글을 읽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칫 소통의 부재를 우려하는 절박함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불통 또는 고립을 우려해 서둘러 그 의미를 검색창에 두들겨 봤음을 고백합니다.

그 뿐인가요. 버스카드 충전을 뜻한다는 ‘버카충’,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는 ‘낄끼빠빠’도 흔해지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조차 몇몇 신조어에 대해 우리말 단어로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줄임말과 신조어가 나올 때마다 우려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세대간 소통이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앞으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민주정의당을 ‘민정당’이라 불렀고, 안전기획부를 ‘안기부’라고 줄여 불렀습니다. 조선과 고려시대에도 기관과 관직을 줄임말로 대칭했다는 문헌도 존재합니다. 그 뿐인가요. 우리는 정부조직을 일컫는 단어, 특정 집단을 호칭하는 대명사에서 여전히 줄임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조어와 줄임말은 문자의 발달과 궤를 함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최근 온라인에서 등장하는 줄임말의 행태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생긴 게 아닌, 유행 따라 생기는 신조어와 줄임말이 특정 집단과 누군가를 비난하는 용도로까지 사용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데요. 드러내놓고 비난하기 어려운 대상을 신조어나 은어를 사용해 비난하는 행태가 온라인에서 일반화됐습니다.

무엇보다 사라져야 할 신조어와 줄임말을 부추기는 방송자막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사정은 더욱 심각한데요. 요즘 TV예능 프로그램은 굳이 음량을 높이지 않아도, 그저 화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체 내용의 90% 이상을 이해할 수 있게끔 제작합니다. 친절하게도 화면이 바뀔 때마다 출연진의 발언과 행동이 자막으로 고스란히 표기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출연자가 내뱉은, 리얼리티의 탈을 쓰고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신조어와 줄임말, 은어는 고스란히 자막으로 표현됩니다. 대부분 온라인에서 시작된 신조어들입니다. 이것들이 쉬지 않고 방송자막으로 이어지면서 오타와 비문은 일반화됐습니다. 방송 사고까지 심심찮게 불거지고 있는 것도 이런 신조어 사용이 늘어났기 때문이지요.

예능 프로그램의 파급력이, 그리고 제작진이 무심코 집어넣은 자막이 10대 청소년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제작진이 알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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