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처펀드의 공습②] 거대 기업사냥꾼에 노출된 한국 기업의 약점

입력 2015-06-18 08:58수정 2015-06-1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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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율 낮은 경영권이 최대 취약

지난 4일 국내 증시에 낯익은 해외 펀드의 이름이 올라왔다. 이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의 지분 7.12%를 보유했으며, 제일모직과의 합병은 불공정하다며 반기를 들었다. 이후 엘리엇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주주총회 결의에 의한 중간배당을 요구하는가 하면, 주주총회 결의 금지 및 자사주 처분 금지 등 2건의 가처분 소송을 잇달아 제기하며 삼성물산을 압박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형적인 벌처펀드의 주도면밀함을 보이는 엘리엇의 속내는 무엇인지, 주장은 과연 정당한지, 전문가들의 시각은 어떤지 등 이번 사태에 대해 5회에 걸쳐 정밀 진단한다.

삼성물산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마침내 법정에 선다.

18일 금융투자업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이튿날인 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부장 김용대)는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법률 대리인이 참석한 가운데 엘리엇이 제기한 2건의 가처분 신청건을 심의한다.

앞서 엘리엇은 삼성물산을 상대로 주주총회소집통지 및 결의금지 가처분, 백기사로 나선 KCC에 대한 주식처분금지 가처분 신청 등을 각각 제기했다. 법 대응에 나서며 기업을 압박하는 헤지펀드의 전형적인 시나리오가 본격화된 셈이다.

가장 큰 쟁점은 이런 거대 자본의 공격에서 한국 기업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이다. 낮은 지분율로 대기업 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경영권의 취약함, 대기업 집단의 모럴 헤저드(도덕적 해이), 기업 승계를 위한 오너가 지배구조 전환 등이 대표적이다. 헤지펀드가 파고들기 쉬운 취약점인 셈이다.

◇SK경영권 뒤흔든 소버린…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다=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03년 모나코 국적의 뉴질랜드계 자산운용사 소버린은 (주)SK 지분을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위협했다. SK그룹은 당시 SK네트웍스의 분식 회계와 SK증권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등으로 부침을 겪고 있었다. 최태원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SK를 포함한 계열사의 주식이 폭락했고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극적으로 등장한 게 소버린이다. 곤두박질쳤던 SK주식을 대거 매입, 14.99%의 지분을 확보했다.

소버린은 아시아와 동유럽 등 경제 기반이 취약한 국가를 대상으로 기업과 부동산 등에 투자해 막대한 투자이익을 거두는 사모펀드로 알려져 있었다.

주가가 살아났지만 소버린은 2대 주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태원 일가의 퇴진과 SK이사진의 총사퇴, SK텔레콤 매각, 그룹의 경영 투명화 등을 요구했다. SK의 부패에 지쳤던 국민들은 소버린 주장에 동조했다. 소액주주들과 SK노조도 소버린에게 의결권을 넘기기도 했다.

당시 소버린은 2대 주주가 된 뒤 SK 지분 14.99%를 5개 자회사에 약 3%씩 나눠 맡겼다. 보유 지분을 나눠 이사회에서 감사위원을 선임할 경우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합계는 3%, 각 일반 주주는 3% 지분율 규정을 준수하면 의결권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전술이었다.

이어 소버린은 보유 SK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전부를 행사하며 경영 투명성 제고 목적으로 경영진 교체와 집중투표제 도입,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했었다.

위기에 빠진 최 회장 일가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자사주를 매입하고 지분을 확보하면서 주가는 정상화에 접어들었다. 약 1조원 규모의 막대한 비용을 들이고 나서야 가까스로 경영권을 방어했다.

SK 경영권을 뒤흔들었던 소버린은 2년 뒤인 2005년 약 9459억 원에 가까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고 한국 자본시장을 떠났다.

◇지분율 낮은 경영권, 모럴 헤저드가 최대 약점=그 무렵 삼성물산도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의 공격을 받았다.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주식 5%를 매집하고, 경영권 참여와 인수합병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삼성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주가는 올랐고 헤르메스는 300억 원의 차익을 거두고 떠났다.

2006년 헤지펀드 칼 아이칸은 KT&G를 겨냥해 6.59% 지분을 매입했다. 주주권을 앞세워 사외이사 자리를 꿰찼고 자회사 매각을 요구하는 등 경영권을 압박했다. 결국 국민연금의 도움으로 경영권은 유지됐지만 이 과정에서 칼 아이칸은 약 1500억 원의 차익을 얻고 빠졌다.

금융투자업계와 재계에서는 이같은 외국계 헤지펀드의 공격이 향후 추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대기업 집단이 지니고 있는 지배구조의 취약점이 여전히 그들의 사정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예로 한국 대기업은 순환출자 구조를 지녔고, 이 구도의 정점에 있는 기업 지분을 확보하면 전체 계열사의 경영권을 거느릴 수 있다. 삼성과 현대차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아가 대기업 집단의 도덕적 해이, 경영권 승계를 중심으로 한 기업 문화 등은 ‘법의 잣대’를 앞세운 헤지펀드의 전략에서 당당할 수 없다는 구조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1998년 IMF이후 자본시장이 외국에 개방되면서 이같은 약점은 꾸준히 노출돼 왔다.

이는 단순히 특정기업의 문제를 넘어 대기업 집단의 경영문화 역시 변화의 시점을 맞고 있음을 시사한다.

엘리엇은 앞으로 다양한 방식의 소송전을 앞세워 삼성물산을 압박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삼성물산의 저평가된 기업 가치를 문제 삼으며 ‘주주권익 보호’를 앞세울 경우 소액주주의 엘리엇 동조 역시 가능한 시나리오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소버린은 SK 지분 매입으로 단기차익을 얻었지만 이번 엘리엇은 장기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이는 단순하게 삼성물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대기업 집단이라면 언제든 외국계 헤지펀드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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