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협력사 과실인데 원청 책임만 따진 정부...軍납품 관행 해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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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탄약 (풍산)
법원이 정부를 상대로 ‘협력업체 과실로 발생한 손해배상금을 깎아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탄약 제조업체의 손을 들어주면서, 하청의 과실까지 원청업체에게 과도하게 책임을 묻는 방산업계 계약 관행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25민사부(송승우 부장판사)는 탄약 제조업체 풍산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정부가 당초 풍산에 환수했던 285억원 중 95%(271억원)을 돌려주라면서 손해배상금을 대폭 감액했다.

이번 사건은 2021년 감사원이 내놓은 방위산업청 감사 결과에서 비롯됐다.

당시 감사원은 1970년대부터 국가에 납품된 탄약 지환통이 국방규격과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 같은 내용을 정부가 40년 넘게 몰랐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커졌다.

국방규격에 따르면 지환통은 습기로 인한 탄약 부식 등을 막기 위해 '방수 아스팔트로 양면이 도포 된 크라프트지 2겹'을 사용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1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는 이듬해 그 책임을 지환통 제조업체인 A사가 아닌 원청업체 풍산에게 물었다. 풍산이 협력업체로 두고 있는 A사의 지환통에 자사 탄약을 감싼 뒤 그 완성품을 정부에 납품했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풍산과 맺은 물품구매계약의 조항을 근거로 댔다. ‘납품 후 5년동안 계약 내용과 동일한 규격과 품질을 보증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정부가 보수·교환 혹은 계약금액의 30%에 해당하는 대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이에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풍산이 납품한 탄약 완성품 54만개에 대한 대금 반환을 통보했다. 이 기간 지급된 대금 950억원 중 30%에 해당하는 285억원을 돌려놓으라는 것이다.

풍산은 방위사업청 옴부즈만 제도를 이용해 항의했다. ‘완성품 가액으로 볼 때 지환통이 차지하는 비율은 5%정도에 불과해 반환금액이 지나치게 크다’는 취지였다. 당시 우리나라 기술로는 미군 규격을 그대로 따온 국방규격대로 지환통을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국방기술품질원 참여 하의 제작 시연 결과도 고려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배상금액 감액을 권고하는 옴부즈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285억원의 반환을 요구하자, 풍산이 이번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풍산이 협력업체 양산품까지 품질을 검수하는 입장인 만큼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전후사정을 고려할 때 정부가 통보한 배상액이 지나치게 크다고 봤다.

재판부는 “풍산이 A사 지환통에 대한 품질 검사를 수행하는 등 관리·감독을 했으나 감사원 감사 전까지는 흠을 인지하지 못했다“면서 원칙적으로는 풍산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정부 역시 수십 년간 검사·검수 과정에서 흠을 인지하지 못한 데 비춰보면 풍산의 잘못이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장기간 불량을 인지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따져 물은 것이다.

그간 정부는 납품 과정에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방산업 특성상 사전에 손해배상 비율을 정해 놓고 원청업체에 일률적으로 통보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이번 판결로 그런 관행이 재고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방산 사건을 다수 맡은 변호사는 "원청업체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협력업체 제품의 과실을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협력업체 대부분이 영세해서 구상권을 청구하기 어려워 손해배상액을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도 많아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또 "그럼에도 협력업체가 잘못했다고 해서 원청업체가 면책된다거나 감경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편인데 이번 판결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다수의 방산 사건에 자문한 또 다른 변호사 역시 “정부로서는 계약서에 적혀있는 대로 원칙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라면서도 "법원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에도 계약 조항에 적혀있다는 이유로 30%를 전부 배상하도록 한 것은 형평의 이념에 맞지 않다고 본 것”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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