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과수 '마약 셜록 홈스' 김은미, 3D 사건 현장에 그녀가 있었다[K 퍼스트 우먼⑭]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과학부장
세계 최초 프로포폴 모발 분석법 개발
긴장으로 보낸 35년, 보람·재미로 버텨”
“여성 리더에 편견 세지만, 단념말고 승부를”

사회부 수습기자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부검 취재였다. 미국 드라마 'CSI'에서나 보던 부검 현장을 직접 본다는 사실에 흥분도 잠깐.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를 연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두통이 절로 난다.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다. 겨우 일회성 취재도 고역이었는데, 무려 35년간 국과수에서 근무하며 '범죄의 증거'를 찾아낸 인물을 만났다.

그는 세계 최초로 프로포폴 모발 분석법을 개발, 국내 마약 사건의 중요 터닝포인트를 만든 이다. 주인공은 김은미 전 국과수 법과학부장이다. 그는 '버닝썬 클럽 사건' 등 중요한 수사에서 마약 분석을 담당했다. 김 전 부장은 "자신의 분석 결과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책임감으로 두 번 세 번 자기검열을 단호히 했다. 국과수 업무를 전형적인 ‘3D(Difficult, Dirty, Dangerous)’라면서도 동료선후배 연구원들의 밤낮 없는 헌신과 책임감 덕분에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때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더는 '마약 청정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혹자는 그를 '마약 셜록 홈스'라고 칭한다. 그 덕분에 한국의 마약 수사는 "반드시 잡힌다"는 명제를 지키고 있다. 수사 못지않게 마약 중독자의 재활과 예방이 중요하다는 그는 은퇴 후에도 강연 등을 통해 마약수사의 발전과 교육에 힘쓰고 있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리더였다. ※대담 : 석유선 생활경제부장

▲김은미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과학부장이 22일 서울 강남구 이투데이빌딩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쓰레기통과 하수구를 뒤지고 2차 붕괴 위험이 있는 화재 현장을 헤집어 증거물을 찾아냅니다. 증인으로 불려간 법정에선 피고인의 날선 시선이 제게 꽂히죠. 이렇게 어렵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 때로는 더러운(dirty) 일을 할 수 있던 원동력은 내 분석 결과로 사건이 해결될 때 느끼는, 말로 다 표현 못 할 벅찬 보람이었습니다.”

김은미 전 국과수 법과학부장은 23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국과수에 몸담은 35년 세월에 대해 “‘3D’ 성격의 특수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버텨 왔다”며 이같이 밝혔다. ‘국내 최고 마약 분석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따르기까지 시시각각 진화하는 과학 학문을 빠르게 좇으며 성별을 불문한 조직 구성원들과 경쟁하는 나날이 필요했다고 했다고 김 전 부장은 전했다.

현실적 이유로 택한 직장, 35년 전문가

정보기술(IT)이 발달한 요즘과 달리 취업 활동에서 특정 기업이나 기관 정보를 쉽사리 수집할 수 없던 1980년대. 그는 국과수에 입사 지원할 당시에 국과수가 뭘 하는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부장이 국과수를 희망 직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됐다.

이화여대에서 약학을 전공한 김 전 부장은 그 무렵 희귀했던 이공계 여성으로서 전공을 살리면서도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사기업에 입사한 친구들이 결혼, 출산 등으로 퇴사를 권고받아 직장을 관두는 사례를 숱하게 본 그는 사회복지제도가 비교적 잘 운용되고 공정한 업무처리를 지향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김 전 부장에게 국과수는 ‘우연 같은 운명’ 같은 곳이 됐다. 생계를 꾸릴 일터라는 의미를 넘어 마약 분석 최고 권위자로서 35년 경력을 쌓은 텃밭이 돼서다. 김 전 부장은 국과수 마약분석과 연구관과 마약분석과장을 거쳐 국과수 지역 분소인 부산과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이후 법과학부 독성학과장을 지내다 국과수를 구성하는 3개 부서 중 하나인 법과학부를 이끄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국과수에서 부장은 부원장급에 해당한다.

법과학부 직원 200여 명을 관리하는 국과수 ‘넘버2’ 자리까지 오른 김 전 부장은 한국 사회 여성으로서 조직 생활과 승진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전제했다. 그는 “국과수뿐 아니라 어느 직장에서든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비슷하다”며 “결혼과 출산 과정을 겪으며 경력 단절도 생기고 일과 가정을 병행해 업무에 전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성원을 관리해야 하는 리더 자리로 가면, 여성들에게 향하는 기대만큼이나 편견도 강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부장은 여성 후배들이 일찍이 성공을 단념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성을 착실히 쌓아가다 보면 조직 안팎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김 전 부장은 “국과수에서는 사건·사고와 직결된, 험한 일을 하는 데다 과학 학문 발전을 신속히 따라잡아야 한다”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특출난 능력을 드러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전문성은 더 필수적”이라고 했다. 또 “뒤처지지 않게 전문성을 키우려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되 늘 공부하고 배우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언급했다.

리더 자리에 오르면 할 일이 더 많아진다. 김 전 부장은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인정받는 일은 지위가 절로 주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김 전 부장은 “높은 지위가 주는 권위만으로는 직원들이 리더를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며, 리더와 직원 간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이뤄진다”며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의 몸으로 시간과 에너지, 금전 등을 부하 직원에게 투자해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김은미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과학부장이 22일 서울 강남구 이투데이빌딩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한 사람 인생 바꿀 마약 분석, 매번 긴장과 책임감의 연속

김 전 부장이 마약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분기점 가운데 하나는 2019년 연달아 터진 마약 투약 사건이다. 독성학과장으로 근무하던 그해 3월 이른바 ‘버닝썬 클럽 사건’이 확산해 500여 명이 넘는 마약사범을 검거하는 데 활약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가수 겸 연기자 박유천의 모발과 체모를 분석하는 일을 총괄해 필로폰 성분을 검출했다.

국과수 마약 분석 결과는 경찰 수사뿐 아니라 재판에서도 결정적 증거로 작용한다. 그래서 김 전 부장을 비롯한 국과수 마약 분석 직원들은 시료 채취부터 감정 결과 도출까지 어느 단계에서나 막중한 책임감으로 임했다고 김 전 부장은 회상했다. “내 분석 결과에 따라 한 사람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항상 정직하게 실험했다. 분석 결과에 책임질 준비도 늘 하고 있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긴장감으로 산 세월이었다.”

김 전 부장은 증거물 감정을 넘어 수사와 재판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겪는 정신적 압박감을 해소하는 것 역시 리더로서 중요한 일로 꼽았다. 국과수 마약 양성 결과가 나온 뒤 박유천은 기자회견을 열어 마약 투여를 부인했다. 세간에서는 국과수 감정 오류 가능성을 거론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20여 일 후, 박유천은 마약 투여를 인정했다.

김 전 부장은 “연구원들은 엄밀한 교차검사를 마친 자신의 실험에 혹여나 실수가 있었을까 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잠을 못 자곤 했다”며 “동료의 분석 능력을 믿고 다독이는 일을 계속하며 ‘마약은 몸 어딘가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마약 분석 기틀을 만들어낸 장본인 역시 김 전 부장이 이끄는 국과수 마약 관련 조직이다. 그가 마약분석과장으로 근무하던 2011년 2월 일명 ‘우유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이 마약류로 지정됐다. 국과수로서는 프로포폴 남용자로부터 그 사실을 증명할 분석법이 필요해진 상황이었다. 김 전 부장과 마약분석과 구성원들은 4개월간 연구에 매달려 모발 프로포폴 분석법을 개발했다. 전 세계 최초 기록이다. 김 전 부장은 “개발은 4개월이 걸렸지만, 쥐 털을 이용한 동물실험과 국제법독성학회 논문게재, 수상까지 마친 뒤 분석 기반이 마련됐다”고 했다.

멘털 유지할 루틴, 나만의 방식 만들어야

국과수 은퇴 뒤에도 김 전 부장의 ‘마약 셜록홈스’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최근 1년간 이화여대에서 과학수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고자 했던 그의 구상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갈 생각이 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업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열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김 부장의 눈에 미친 한국 마약 정책의 현실은 우려스럽다. 마약 수사 역량은 충분한데, 재활과 교육은 부실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당장 김 전 부장이 국과수에 몸담고 있던 지난해 2월에도 국과수에는 마약과가 신설됐다. 이런 문제의식을 오래도록 갖고 있던 김 전 부장은 현직 시절에도 국과수 본원이 있던 원주에서 지역 청소년들에게 특강을 했다고 한다.

그는 “마약은 한 번 중독되면 끊기 어려워 자꾸 재범을 저지른다”며 “다른 정신질환자보다 치료에 큰 비용이 소요돼 정부 지원이 없이 지속하기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약 교육과 관련해서는 “청소년이 마약을 시작하는 주된 계기가 호기심이라는 점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약 유해성 교육이 중요하며 대면 강좌뿐 아니라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한다”고 했다.

김 전 부장은 마약 분석 관련 업무부터 과학수사, 정부 기관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자신만의 ‘루틴(routine)’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루틴은 스포츠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며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많은 것을 지녔거나 더 나아 보이는 상황에 있는 상대를 만나면 그들의 루틴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남의 루틴을 모방만 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는 아침 5시에 일어나 매일 수영을 하고 출근했지만, 꼭 운동이 아니라도 좋다”며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한 잔의 물에도 우리 정신은 맑아질 수 있으며, 작고 쉬운 행동으로 시작해 꾸준히 지키다 보면 작은 루틴이 모여 우리 삶은 더 알차고 단단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은미 전 국과수 법과학부장이 걸어온 길 (이투데이 그래픽팀=신미경 기자, 사진=신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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