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정 중령(진)이 택한 삶의 태도는 강함보다 ‘유연함’이었다. 쉽게 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좌절을 경험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중시했다. 인터뷰 내내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유형지표(MBTI)상 내향형(I)이라며 칭찬을 쑥스러워하던 모습을 보니, 무섭기만 한 군인이 아닌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묻어났다. 제복의 무게를 견디면서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은 전투조종사를 꿈꾸는 제2의 정다정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경남 사천에서 진행한 정 중령(진)과의 인터뷰는 당찬 여성 파일럿과의 만남을 넘어 급변하는 국내외 국방 지형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미래를 고민하는 충성심 있는 군인과의 만남, 그 자체로 중량감 있는 시간이었다.

나와의 싸움 이기며 ‘여군 1호’ 타이틀
시제기 비행 생사 넘나드는 순간 많아
이달 초 경남 사천 공군부대 인근에서 만난 정 중령(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남녀 간 물리적인 체력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종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모두에게 차별 없이 같기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전투기를 내 힘으로 날려야 한다면 물리적인 힘의 차이가 중요하겠지만, 조종사라면 누구에게나 기준을 똑같다”며 “동료는 동료의 9배, 나는 나의 9배를 버틸 수 있는 훈련을 통해 조종 임무를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중령(진)은 내년부터 우리 공군에 실전 배치될 한국 최초 국산 전투기 KF-21의 개발시험비행 조종사 8명 중 한 명이다. 2019년 개발시험비행 교육과정에 여군 최초로 선발됐다. 그는 현재 비행 안정성 및 성능 평가라는 전력화의 마지막 관문을 책임지고 있다.
정 중령(진)이 KF-21 시험비행 자격을 얻은 건 지난해 8월이다. 책임감이 큰 임무인 만큼 노력해야 할 것도 많았다. 조종 외에도 비행기 원리와 기술, 나아가 전술을 아우르는 전면적 준비가 요구돼서다. 통상 여성은 기술과 공학에 약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깬 대목이기도 하다.
정 중령(진)은 “시험비행 조종사는 충분한 준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날 비행을 허비할 수도 있다”며 “비행에 적용되는 원리, 조작법 등 기본이 되는 것들은 충분히 준비해야 그날 비행에서 일명 ‘미션 컴플리트’(임무 완료)를 하고 내려온다”고 했다.
그는 “기체 자체도 알아야 하지만, 에너지의 흐름이나 제어 법칙, 레이더 원리, 무장, 나아가 적 항공기의 성능과 전술, 대응책까지 연구해야 한다”며 “시험 비행 중인 항공기는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보니 이상이 있으면 엔지니어와 같이 비교하고 소통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물론 ‘여군 최초’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위험했던 순간들도 많다. 상공을 나는 비행기 특성상 예상치 못한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고,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가르는 긴박한 순간도 많아서다. 특히 시제기 비행은 기체 점검을 위해 극한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때가 많아 일반 비행보다 위험 부담이 더 클 때도 잦다.
정 중령(진)은 “좋았던 순간도 오래 기억에 남지만 위험했던 순간들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짙은 날, 상대 편조의 후류에 의해 내 항공기가 잠시 컨트롤 되지 않을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도 있다”고 말했다.
착륙 장치 고장으로 비상 탈출 직전까지 갔던 날도 있다. 정 중령(진)은 “상공에서 기계적 결함으로 전투기의 한쪽 메인 랜딩기어가 반만 접혀서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며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비행 착륙기어 펼침 창지를 사용해 무사히 착륙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활주로에 비누 거품 같은 미끄럼용 용액까지 준비해 놓을 정도로 긴박했던 상황이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조종사가 되기까지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험생 시절 내내 책상 앞에서만 붙어있던 학생들을 공군사관생도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혹독한 군사 훈련을 지나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또다시 견뎠다. 그런데도 포기란 없었다. 정 중령(진)은 “공군소위로 임관 후 비행 훈련을 받을 때 정말 많이 힘들었다”며 “그래도 조종사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기한다, 중도 하차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여군이 여전히 소수인 군 조직에서 정 중령(진)은 그 소수성을 숨기거나 억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행동하며 자신만의 길을 정면으로 걸어왔다.
정 중령(진)은 “저는 시험비행 조종사를 하고 싶어 지원했을 뿐인데, 조직은 저를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며 “기존에 남성 조종사만 있을 때는 옷도 그냥 갈아입으면 되지만, 여성 조종사가 추가되면서 새로운 변수가 생긴 셈”이라고 했다.
그는 “성별을 떠나 소수는 어디서든 튀기 마련”이라며 “다수가 남성인 군에선 여성이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튈 거라면 ‘잘해서 튀자’는 마인드,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잘 해보자는 마음으로 극복해왔다”고 덧붙였다.
소수자가 마주하는 벽에 대해서도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정 중령(진)은 “다수의 집단에서 소수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가치관 등 무엇에서든지 다름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그 부분에 대한 돌파구라거나 대안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이어 “지금 당장 주류가 아니더라도 이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며 “꾸준히 본인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고, 그 기회를 잡았을 때는 반드시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이 있을 것”고 강조했다.
여성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남겼다. 정 중령(진)은 “좌절하고 상처받는 순간이 분명히 올 텐데, 그런데도 자신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그런 작은 인정들이 모여 힘이 되고 다시 버틸 수 있게 만든다”고 했다.
“좋았으면 추억, 나빴으면 경험” 긍정사고
여성 리더의 ‘유연함’, 안부러지고 버티는 힘
다시 힘써야 할 때 그 탄성으로 일어설 수 있어
정 중령(진)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무인기 기술 확산이 조종사의 역할을 위협한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것으로 전망했다.
정 중령(진)은 “AI·무인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며 “무인기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의 결단이 필요해 조종사의 역할이 없어진다기보다는 형태가 달라질 것으로 본다”고 봤다.
그러면서 “이미 공군에서도 몇 년 전부터 이에 발맞춰 준비 중”이라며 “학술 세미나 등에도 참여해 육·해·공군의 무인화 현황도 참고하고, 선진화한 외국 소식도 많이 접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 중령(진)은 여성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로 유연함을 꼽았다. 정 중령(진)은 “유연한 게 약한 건 아니다”라며 “오히려 유연해야 안 부러지고 계속해서 버틸 수 있고, 다시 힘을 써야 할 때는 그 탄성으로 힘도 쓸 수 있다. 마음이 딱딱해 깨져버리면 다시 붙이기가 너무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는 “좋아하는 말 중에 ‘좋았으면 추억, 나빴으면 경험’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며 “좋을 땐 충분히 좋아하고, 나쁜 일은 자책 대신 충분히 자기화하는 시간을 통해 다음에는 반복되지 않게 경험을 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연함에 대한 가치관은 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최근 중령 진급자 명단에 오른 정 중령(진)은 이제 ‘조종사’에서 ‘리더’로 생각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정 중령(진)은 “군 조직에도 여성 인력이 많아지고 있다”며 “아직 시험비행 조종사는 없어도 전투기 조종사에도 여성 후배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후배들이 유입되고 계급이 올라가다 보면 비행보다 조직을 위해, 데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생각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며 “그때마다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지 않으려노력하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