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몰랐던 대학생...멘땅에 헤딩 기본, '금녀 구역' 실험실서 인정 받아
고체·원자핵 물리학 넘나든 독특한 이력이 오히려 '득'..."여성 장점 통해"
“그저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그의 이 담백한 말 속에는 오랜 시간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격을 의심받아야 했던 시대에 맞선 한 과학자의 결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 내내 민 원장은 △지속가능성 △연구자 중심의 시스템 △다른 시선의 가치 등을 화두로 제시했다. 이는 비단 과학계에만 머무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다르게 봐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그의 철학은 편견을 넘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지금도 각자 영역에서 묵묵히 분투하며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의 따뜻한 메시지는 제2의 ‘K퍼스트우먼’을 만들어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담 : 석유선 생활경제부장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건 차별화가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민병주 KIAT 원장 앞에는 늘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국내 최초로 중이온가속기 실험을 수행한 여성 물리학자,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 여성 최초 한국원자력학회장과 KIAT 원장. 어렵고 힘들어서 잘 가지 않은 길을 혼자 헤치고 도착한 민 원장은 늘 '최초'라는 타이틀 앞에 겸손했다. 최초로 주어진 기회인 만큼 업무를 성공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매 순간 여성 리더로서 후배들을 위해 좋은 선례를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된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 그러나 당시에는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려야만 겨우 넘을 수 있는 큰 허들이었다. 학부 때 물리학을 전공한 민 원장은 대학원 진학 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원자핵물리학은 물론 원자력연구소 등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른바 금녀 구역에서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걱정이나 우려보다는 '여성이 어딜 감히'라는 무조건 반대만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민 원장은 대학원생 시절, 일본 유학을 가면서 전공을 고체물리학에서 원자핵물리학으로 바꿨다. 지도 교수에게 가속기 실험을 하고 싶다고 하자 돌아온 답은 '여성에겐 맞지 않는다'는 단호한 거절뿐이었다. 가속기는 실험 전후 반나절 이상의 워밍업 과정이 필요하고 본격적인 실험을 할 때는 밤새는 일이 수두룩했다. 핵물리학 특성상 방사성 물질에 노출이 잦고, 계측기 등이 실험 기구가 무거워 힘이 많이 필요한 점도 핵물리학 실험실에서 여성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칠전팔기(七顚八起), 거절당해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끈기를 보였던 민 원장은 '일단 6개월만 연구생으로 일해보고 결정하자'라는 조건부 승인을 얻은 뒤 일본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실험실이 생긴 지 70년이나 됐는데 그동안 일본인을 포함해 외국인 중 여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성이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민 원장은 부단한 노력은 주변 사람들의 막연한 걱정을 확신으로 바꿔놨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어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상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말할 때마다 바로바로 찾아보는 건 기본이었고, 평상시에 대화를 자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문장을 다 완성 시키기 전에 지레짐작해서 대답하지 말고 끝까지 듣고 문법에 틀린 것은 고쳐주고 대답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개방적 사고로 임한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몰랐을 때 물어보는 건 자존심 상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떻게든 제대로 보여주겠다'라는 게 진짜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며 "외국인인데 일본어를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노력해서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게 진짜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체물리학과 원자핵물리학을 모두 아우르며 연구한 민 원장의 석·박사 이력은 그가 원자력연구원에 입사할 때 되레 빛을 발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민 원장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원자력연구원에선 원자력 설계사업이 한창이었다. 인재가 많이 필요했던 터라 유학파 출신에게 합격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민 원장은 예외였다. 여성,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민 원장은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요인이 더 많은 지원자였기 때문이다.
민 원장은 "고체물리학을 전공한 소장이 40분 동안 내가 쓴 논문을 가지고 질문을 했다. 그중 한 현상은 고체물리학과 원자핵물리학에서 모두 쓰는 용어였는데 고체물리학 관점에서 틀렸다고 지적했다"며 "마치 꼬투리를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고체물리학 입장에선 소장이 말한 게 맞지만, 원자핵물리학에서는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 했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입사를 진행하게 하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남들은 쉽게 하지 않는 고체물리학과 원자핵물리학을 모두 전공한 게 오히려 득으로 작용한 것이다.
어렵사리 원자력 연구소에 입사했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은 계속됐다. 당시 특채로 입사한 동기 3명 중 민 원장만 유일한 여성이었고,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타지에서 온 여성 연구원으로 외로웠지만 이를 악물고 버틴 유학 시절은 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민 원장은 "1997년 말 원자력안전전문위원이 구성될 때 반드시 여성 한 명은 들어가야 했는데 그 당시 외국에서 학위 받고 전문분야를 전공한 여성이 원자력계 전체에서 제가 유일했다"며 "덕분에 마흔이 되기도 전에 원자력안전전문위원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민 원장은 "여성으로서의 장점이 통했던 것 같다"며 "남성이었으면 똑같은 조건이었을 때도 못 들어갔을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민 원장은 가장 중요한 건 '지속 가능성'이라며 후배들이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편적으로 노벨상이 많이 나오는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과학연구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민 원장은 "일본은 담당 교수가 정년퇴직 등의 이유로 바뀌어도 연구 테마는 바뀌지 않고 계속한다"며 "몇십 년의 연구 실적이 쌓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돼 노벨상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 원장은 일본 유학 시절 참석한 학회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1980년대 말 당시 조수 한 명이 교토대학 연구팀이 발표하는 것을 보고 '쟤네들은 맨날 저것만 해'라고 했다. 30여 년이 지난 2014년, 노벨상을 거머쥔 팀과 연구주제도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였다면 30년 동안 같은 연구하게 놔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미국처럼 교수가 팀을 꾸리지 않냐. 교수가 연구 주제를 가져다주면 학생들이 연구하는 구조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연구 결과물이 쌓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실패한 게 있어야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 구조"라며 아쉬워했다.
민 원장은 꽉 막힌 시스템에 대한 답답함도 토로했다. 특히 일본은 연구자 관점에서 마련된 시스템이지만 한국은 행정 중심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시작하기) 3개월 전 필요한 물건을 모두 나열해서 행정실로 보내고 한꺼번에 모아 비교적 저렴하게 입찰해온다"며 한국의 수직적이고 딱딱한 행정시스템과의 차이가 크다고 언급했다. 이어 "독일의 경우 몇 년 단위로 평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면 종신직인 경우도 많다. 연구를 정말 잘하는 사람만 끝까지 연구하고, 기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 지속성을 가져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학기술계 잔뼈가 굵은 전문가인 민 원장은 2012년 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 당선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했다. 연구에만 몰입해온 민 원장을 정계로 입문시킨 건 과학기술 관련 토론회에서였다.
민 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비대위원장이 되기 전 과학기술 관련 토론회에 대표 패널로 참석했다. 과학이 우리 생활과 굉장히 밀접한데 국민이 과학을 어려워한다. 국민이 과학을 이해하면 안전해지고 안전해지면 복지비가 줄어든다는 논리를 가지고 설명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당시 박 전 대통령이 과학은 물론 안전, 복지에 관심을 클 때여서 제가 비례대표 1번으로 선택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정치인에 뜻이 없었던 민 원장은 가족에게도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는 "정치인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으니까 가족 모두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 저 역시 국회의원의 상징성이나 정치를 위해 한 게 아니다 보니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들이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가족을 위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민 원장은 후배들에게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성끼리도 마찬가지겠지만, 남성과 여성은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다르게 봐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 늘 같은 시각만 보는 사람들과 일하면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렵다"며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보고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