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몸담았던 여성이라면 잊지 못할 이름이 바로 ‘양향자’다. 삼성전자 최초 고졸 출신 여성 임원. 본지가 기획한 ‘K퍼스트우먼 : 한국 경제의 최초를 연 그녀들’ 기획 시리즈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입사 초기 ‘미스 양’으로 불리던 그는 끝내 ‘양 상무’가 됐다. 남성 임직원들은 “무서운 여자”라고 뒷말을 하기도 했다.
국내 최고 대기업을 떠난 이후 그의 선택은 험하디험한 정치판이었다. 1985년 그가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첫발을 내디딘 그때와 정치인 양향자의 시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러 편견과 뒷말은 그의 뒤통수를 따갑게 했다. 곡절 끝에 자력으로 국민의힘 최고위원 자리를 꿰찼다. “리스크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Risk, No Gain)” 그의 담대한 행보는 언제나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의 결괏값을 냈다. 그의 행보에 지금도 계속 시선이 가는 이유다. ※대담 : 석유선 생활경제부장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어야 한다.”
2016년 1월 12일, 양향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정치에 입문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문장은 지난달 본지와 진행한 인터뷰 내내 반복되어 되살아났다. 양 위원은 “나는 지금도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막 깨지고, 넘어지고, 두들겨 맞고, 내가 그 과정을 제일 잘 알잖아요”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눈가에는 북받친 듯 눈물이 맺혔다.

삼성전자 최초 고졸 출신 여성 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양 위원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입사해 설계팀 책임연구원, 수석연구원, 부장을 거쳐 2014년 삼성전자 창립 이래 최초 고졸 출신 상무 자리에 올랐다.
양 최고위원의 유리천장은 세 겹에 이를 정도로 두꺼웠다. 학벌의 벽, 여성의 벽, 출신의 벽. 그는 이 벽을 ‘밀어 깨는’ 대신 후배들을 먼저 세우는 조직 설계로 구조를 고쳐 통로를 냈다. “노 리스크, 노 게인(no risk, no gain). 희생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말처럼 매일의 공부와 현장의 축적된 노력으로 30년 직장 생활에서 ‘최초’와 ‘최고’의 신화를 스스로 당당하게 써 내려 갔다.
말단 연구원보조로 입사해 28년 만에 ‘삼성의 별’이라는 상무 자리에 오르기까지 묵묵히 걸어온 양 최고위원. 지금은 ‘첨단산업의 언어’로 다음 세대의 사다리를 다시 짜고 있다. 어느덧 정치 10년 차를 맞은 그는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그걸 제도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첫 책상은 회의실 구석이었다. 복사와 커피 타기, 반도체 회로를 베끼는 일이 그의 하루였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 속에서도 그는 구조를 익히고 틈을 기록하며 자신만의 공부를 이어갔다.
전환점은 복사본 아래 0.5㎜ 볼펜으로 달기 시작한 일본어 해설이었다. ‘고졸은 수강이 불가하다’며 막혔던 사내 일본어 강의에 수십 번 문을 두드린 끝에 입실을 허락받았고, 석 달 만에 사내 첫 자격증을 취득했다. 번역본이 연구원들 사이에 돌면서, 누구에게나 “미스 양”으로 불리던 이름이 처음으로 “양향자 씨”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설계 보조로 자리를 옮기며 ‘복사하는 손’에서 ‘설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출산 뒤 대졸 직급(E-3) 승진을 앞두고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견에 부딪혔다. 그는 퇴사를 각오하고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승진으로 이어졌다. 이 경험은 개인의 용기가 제도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변화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제도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뚜렷이 깨달았다.
양 위원이 말하는 마인드 컨트롤의 핵심은 ‘목표의 선명함’이었다. “내가 이 회사에서 이루고자 하는 업이 분명했다. 반도체로 성공해 인류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어 “그런데 배움은 짧고 가진 것은 없고... 성취해 나가는 게 너무 느렸다. 늦게 가더라도 뒤로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임원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수석연구원으로 조직을 맡으면서 그는 일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갈아엎었다. 설계보다 사람을 먼저 보았고, 성과보다 구조를 먼저 설계했다. 양 위원은 “100명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30%는 현재 프로젝트, 30%는 다음 단계 선행 투입, 30%는 학습과 재충전, 10%는 비상 대응 인력으로 운영했다”며 “시간이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는 방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일의 리듬을 새로 짠 것이다.
그의 팀은 유독 다양했다. “여성이 가장 많았고, 장애인도 있었고, 고졸 출신도 많았어요. 각자의 최고 역량을 파악해 가장 행복해하는 일을 맡겼죠.” 사람을 우선하는 그의 철학은 곧 성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양 위원이 이끌던 플래시개발실 설계팀은 삼성전자 최초로 GWP(Great Work Place)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GWP를 ‘재미있게 일하면서 회사의 성공에 기여하는 에너지가 가득한 일터’로 정의하며 조직 문화 혁신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삼무원’(‘삼성+공무원’의 합성어)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며 조직 문화에 대한 내부 비판이 나오지만, 양 위원의 팀은 진정한 의미의 ‘일하기 좋은 팀’을 구현한 상징적 사례였다.
이 성과는 곧 예상치 못한 ‘임원 발탁’으로 이어졌다.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조직 운영이 실제 성과로 입증됐고, 그것이 삼성의 리더십 모델로 인정받은 것이다. 양 위원은 “제가 남들보다 특별히 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라, 삼성이 사회에 던진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며 “저런 배경의 사람도 열심히 하면 꿈꾸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저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발탁 과정에는 여러 사람의 신뢰와 추천이 있었다. 플래시개발실의 상사였던 전영현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비롯해 전동수 전 사장, 경계현 고문 등이 한목소리로 그를 추천했다. 최종 결정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내렸다. 양 최고위원은 “연한(年限)을 채우지 않은 파격 승진이었지만, 그만큼 제게는 ‘호남·여성·고졸’이라는 유리천장을 장점으로 바꾸라는 숙제가 주어졌던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양 최고위원이 정의하는 리더는 간명했다. “고수는 전체를 관통해 막힌 곳을 뚫는 사람이다. ‘내 성과’가 아니라 ‘조직의 성과’를 설계해야 한다. 대충하면 괴물이 나온다. 칩도, 사람도.”
그가 삼성에 남긴 건 시스템만이 아니다. 양 최고위원은 늘 ‘사람의 온도를 확인하는 리더’였다. “하루에 한 명씩 점심을 함께하며 듣는 ‘만만한 동행’을 했다.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임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후배들이 털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가정의 어려움도, 커리어의 불안도,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역할이 섞여 있었다. 양 위원은 “선임 3년 차에서 거의 퇴사했다. 선임 4년 차에서 보통 책임으로 승진하는데 승진이나 결혼 둘 중의 하나는 그냥 포기한다. 아이를 낳아도 못 키우니 퇴사율도 어마어마했다”고 말했다.
자신 또한 같은 시간대를 통과한 사람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야간 설계를 이어가던 시절의 기억은 지금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세대의 워킹맘’이 된 지금도 생생하다. “딸이 교사인데, 아침에 학교에 일찍 가면 한두 시간 애를 맡길 데가 없어요. 결국, 친정 부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하죠.”
양 최고위원은 이 현실을 “개인의 근성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책임”이라 말했다. “24시간 돌봄센터처럼 언제든 맡길 수 있고, 국가가 선생님을 인증하며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책임지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맡기는 사람도 안심하고, 돌보는 사람도 자부심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이 존중받는 일이 돼야 한다. 그게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생존 시스템”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동행은 부드러웠지만, 결코 가벼운 리더십은 아니었다. “감시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이 세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유를 주되 목표를 명확히 하면 성과는 따라온다.” 그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다. “밤에 하든 낮에 하든 상관없다. 다만 파이프라인을 다음 단계로 넘길 만큼 집중하라. 시간 보상이 아니라 결과 책임이다.” 양 위원의 리더십은 통제보다 신뢰에 가까웠다.

양 위원은 인터뷰 내내 ‘후배’라는 단어를 자주 꺼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목표 의식이 없다기보다 ‘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모르면 아무리 노력해도 방향이 안 선다.”
양 위원은 자신의 30년을 돌아보며 “나는 결핍의 농도가 진했다”고 말했다. “가진 게 적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그래서 한 길로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가 분명하면, 그게 방패가 됩니다. 실패도, 좌절도, 그 방향만 잃지 않으면 전부 자산이 되더라.”
후배들에게 그는 “너를 궁금해하라”고 말한다. “결국 벽은 다 있다. 하지만 벽은 두드리면 깨지고, 돌아가면 길이 되고, 넘으면 시야가 넓어진다. 중요한 건 그 벽을 마주할 때 ‘왜 이 길을 걷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에 몰입하는 사람으로서 한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최근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퇴사의 주된 요인으로 꼽히는 ‘번아웃’에 대해 “번아웃은 분노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분노가 나를 지배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건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이다.”
그는 그 감정을 ‘자양분’으로 바꿨다. 양 최고위원은 “누구를 탓하기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지는 게 리더의 본질이니까”라고 했다. 정치에서도, 회사에서도 그 원칙은 같았다. “결단의 책임, 결과의 책임, 선택의 책임. 그 책임을 내려놓는 순간 조직은 흔들린다. 결국 정답은 나 자신에서 나온다.”
양 최고위원은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하는 일이 당장은 결과로 보이지 않아도, 그 시간은 근육이 된다. 다슬기를 잡으러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 건졌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물살을 견딘 힘이 생긴다. 그게 결국 당신의 자산이 된다.”
그는 자신의 발탁을 “삼성이 사회에 던진 메시지”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다음 문장을 힘줘 말했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스펙이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되는 사회. 제도와 조직으로 설계하는 게 저의 숙제다.”
양 위원에게 ‘성공’은 영감(인스퍼레이션·inspiration)이 아니라 절박함(데스퍼레이션·desperation)에서 시작됐다. “절박함이 없으면 인스퍼레이션도 공허하다. 진짜 성과는 시간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로, 그리고 책임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같은 긴장 속에서 자신을 단련한다.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 키맨조차 막아서는 조직은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그의 눈은 여전히 미래를 향해 있다. “희생 없이 얻어지는 건 없다. 다만 다음 세대의 희생 총량은 줄이자.” 그래서 그는 지금도 설계를 멈추지 않는다. 제도의 회로를 짜고, 세대의 구조를 고치는 일. 그리고 언젠가 손주를 안은 ‘할머니 정치인’으로서 돌봄과 교육, 노동이 이어지는 나라의 시스템을 완성하겠다는 꿈을 품는다. “절박함으로 버텨온 제 세대의 길 위에서, 다음 세대는 조금 덜 아프게, 그러나 더 멀리 걸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