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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도 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한 지인은 귀국 직후 모교 교수님 사모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애도를 표할 목적이었지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도 문상을 갔다. 그런데 눈에 익은 많은 또래들이 검은 양복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방문객을 맞는 것은 물론 청소며 식사 나르기에 바빴다. 어떤 사람은 아예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른 방에 모여 누워 있거나 졸고 있었다. 친지들보다 더 많으면서 더 열성적으로 봉사(?)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던 친구와 선·후배들이었다. 이들에게 교수의 경조사에서의 봉사는 일상이었다.
몇 년 전 우리 지역에서 잘 아는 몇몇 사람이 유명 대학으로 이동했다. 내가 알기로 연구실적은 거의 없거나 최소 기준만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많고 많은 우수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그런 대학에 어떻게 입성하게 되었는지 참 흥미롭다. 안에서 누군가 끌어주고, 밖에서 힘 있는 사람이 밀어주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런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자면 많은 시간과 화폐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인간관계의 기술이지 학문적 지식이 아님은 자명하다.
작년 말 서울대 대학원 학생들이 교수 집의 개밥까지도 챙겨 줘야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학생은 이미 은퇴한 교수의 집에서 잔디를 깎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줬다. 교수 부인의 비행기표를 예매해 주고 교수 아들 생일파티를 위해 풍선을 분 대학원생도 있었다니 말문이 막혔다. 이 학생들이 배운 것은 개밥 주는 지식과 생일파티 기획 방법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보다 결코 덜하다고 할 수 없는 황당한 일도 요즘 벌어지고 있다. 국제화 시대를 맞아 영어 사용 가능자라는 조건이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최우선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경우 학문적 역량보다 영어구사능력이 더 중요하다. 어떤 이는 동일한 연구 역량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영어가 최우선 조건인 이상 영어 활용 가능자가 우선적으로 선발된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학술지식보다 ‘생활영어’를 배우게 된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경우 비영어권 국가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교수로 채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은 보편성을 갖는 동시에 특수성도 갖는다. 곧 같은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국이 직면한 문제도 서로 다르다. 자연과학도 그러할진대 인문학과 예술, 나아가 사회과학은 특히 그렇다.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양한 의제들이 교류될 때 새로운 접근방식과 새로운 의제도 등장한다. 하지만 단일 문화권의 학자들이 한국 강단을 거의 독점하고 있으니 새로운 지식이 창조될 리가 없다. 하나의 ‘지식궤적’에 구속되어 지식은 ‘경로의존적’으로 진화할 뿐이다.
정부가 연일 창조경제를 부르짖고 있다. 지식 기반 시대에 돌입하면서 경제활동에 기여할 지식은 주로 대학에서 창조된다. 하지만 몰상식을 인내하는 지식, 경조사 지식, 인간관계 관리 지식, 개밥 주는 지식, 생활영어가 학술 지식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곳과 단일 문화 경로에 구속된 지식궤적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이 창조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한국사회에서 창조경제는 처음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