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에 문턱 높은 대형병원들
얼마 전 씁쓸한 통계 하나가 나왔다. 서울시가 25개 자치구별로 인구 10만명당 연간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사망률이 낮은 자치구는 서초·강남·송파구 순이었다. 반면 중랑구, 금천구, 동대문구 등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사망률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격차가 10년 전과 비교해 더욱 벌어졌다는 점이다.
201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서도 전국 노동자 가구를 소득에 따라 다섯 구간으로 나눴을 때 가장 하위 소득 계층은 가장 상위 소득 계층과 비교하면 사망률이 무려 2.5배나 높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도 있다.
부의 양극화도 모자라 건강까지 양극화되는 시대다. 돈 많은 사람이 더 건강해지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러한 건강 불평등 현상은 의료 상업화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건강검진이나 병원에서 질 높은 치료를 받을 기회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반면 병원이 영리 수단으로 전락해갈수록 서민들의 건강과 생명은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환자권리팀장은 “종합병원과 의원급병원간에 기능이 분화돼 있지 않다보니 대형병원에 환자들이 몰려드는 있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학병원의 경우 검체 물량이 많은데다 풀가동이 가능해 검사 장비를 많이 들여올수록 남는 장사라는 얘기다.
인구가 고령화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건강검진 서비스 마케팅도 치열해지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Big 5 대형병원은 이미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지 오래다. 특히 초우량 고객을 모시기 위한 VVIP 마케팅이 대세다.
이기훈 동국대 행정대학원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매니지먼트 과정 주임교수는 “보수적이던 의료 분야에서 상위 1%의 건강을 챙기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 최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VVIP 마케팅 트렌드”라고 말했다.
첨단 장비를 사용한 플래티넘급 건강검진 프로그램은 기본, 일대일 맞춤 건강관리와 해외 24시간 응급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곳도 다수다. 전담 주치의와 헬스매니저, 통역사까지 에스코트하는 등 의전서비스는 특급호텔을 방불케 한다. 가격도 고가다. 적게는 40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에 이른다.
실제 업계에 따르면 건강검진센터가 의료기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12% 정도인 데 반해 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3~87%에 달했다. 병원들이 돈 되는 검진센터 투자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고가 치료 권하는 병원들…건강불평등 심화 = 하지만 서민들에겐 질 높은 의료서비스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대형병원들의 비급여 진료비 부담이 큰 탓에 저소득층들은 대형병원이 제공하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례로 암은 현대에 이르러 의료기술과 장비의 발달로 치유가능한 질환이 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한다.
최첨단 암치료인 로봇수술의 경우 시술 한 건에 1000만원을 훌쩍 넘기도 했다. 일반 수술의 6~10배 가격이다. 다른 부위의 손상은 주지 않으면서 부작용이 적어 꿈의 암치료기라 불리는 ‘양성자치료기’만 하더라도 건강보험 적용이 안돼 1회 사용에 1500~2000만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암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비율은 70%로, 환자가 오롯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만 기본이 수천만원이다.
최성철 암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로봇수술의 경우 전립선암 등 특정암에 제한돼 있으며 사고나 합병증의 위험도 큰 것으로 알려졌지만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권하는 실정”이라며 “항암치료 역시 치료효과를 높은 병행치료가 보편화돼 환자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치료비 탓에 암환자들이 파산하지 않도록 비급여 부분을 줄여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정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내는 본인 부담 비용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서 비판이 일고 있다. 정부 재정 악화의 원인이 되는 기초 수급자에 대한 의료급여 과잉 지급을 막겠다는 목적에서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의료비 부담이 커져 진료를 포기하는 빈곤층이 늘어날 것이라 우려한다. 건강 불평등만 부추기는 격이라는 지적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정숙 활동가는 “지금도 저소득층의 경우 의료비 때문에 의료 이용을 포기한 경험이 20~25%에 이른다”며 “본인 부담금이 늘어나면 빈곤층의 ‘의료 소외’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