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주52시간 규제’론 경쟁 어렵다

입력 2024-12-1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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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설 한국좋은일자리연구소장ㆍ일자리연대 집행위원장

생산성 뒤진 한국 근로시간도 짧아
워라밸만 외쳐선 반도체 경쟁 못해
연구개발직 규제 예외 적용 시급해

2012년 일본을 방문해 현지 대기업들의 근로시간실태를 취재하면서 적지않게 놀란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수 없는 긴 연장근로시간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노동기준법상 연장근로 한도를 주 15시간, 월 45시간, 연 360시간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개별 기업 노사가 합의를 할 경우 이 기준보다 더 길게 연장근로를 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 방문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노사협정을 통해 노동기준법보다 긴 연장근로시간을 정해놓고 있었다.

히타치의 경우 연장근로한도는 월 127시간, 연 1000시간으로 노동기준법보다 2배 이상 길었다. 도요타 노사 역시 월 90시간, 연 720시간으로 연장근로협정을 맺고 있었고 미쓰비시상사(월 115시간, 연 800시간), NEC(월 120시간, 연 960시간), 코니카미놀타(월 80시간, 연 600시간) 등도 모두 노동기준법 한도를 훨씬 웃도는 연장근로시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현지에서 만난 렌고(連合·일본 노동조합총연합회) 간부는 “기업이 생산활동에 필요해서 연장근로를 늘리는데 노동조합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주당 68시간까지 가능했던 법정 근로 허용시간을 일자리창출 차원에서 52시간까지 줄이려다 일본의 연장근로 실태가 알려지면서 이를 철회한 적이 있다.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이 뒤처지는 한국이 일본보다 근로시간을 더 짧게 단축한다는 게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장시간근로에 따른 과로사가 사회문제화되자 아베 정부 때인 2018년 근로시간 개혁을 단행해 노사합의를 통해 정할 수 있는 연장근로한도를 월 100시간, 연 720시간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월 연장근로 52시간에 비해선 여전히 두 배가량 많다.

글로벌시장에서 우리와 반도체 패권경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 대만도 근로시간 유연성이 높은 편이다. 미국은 주급 684달러 이상의 고위관리직·전문직·컴퓨터직이나 연소득 10만7432달러 이상 고액 연봉자는 화이트칼라 면제(연장근로수당 제외) 대상이어서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받지 않는다. 연장근로시간 허용 한도가 높은 일본 역시 연봉 1075만 엔 이상 연구개발 인력, 첨단 기술엔지니어, 금융 애널리스트 등은 ‘화이트칼라 면제’대상이어서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된다.

대만은 월 연장근로 한도가 46시간으로 우리나라보다 6시간 짧지만 노사의 자율적 합의를 통해 시간을 늘릴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강자로 등장한 중국 역시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하는 것을 의미하는 ‘996’관행이 통용되고 있다. 엔비디아, TSMC 등 반도체 글로벌 기업들은 근로시간 유연성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반도체기업들은 52시간규제에 발목이 잡혀 글로벌경쟁에서 갈수록 뒤처지는 모습이다. 마치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경쟁기업들과 달리기시합을 하는 형국이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일하는 시간까지 짧은데 어떻게 경쟁에서 이길수 있나. 노동계와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워라밸’ 타령만 외치며 정부와 여당이 제출한 반도체특별법에 반대하고 있다. 반도체산업 연구직에 대해 주52시간 규제 예외 적용을 담고 있는 이 법에 대해 이들은 장시간 노동을 유발해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집중적인 연구개발이 필요한 반도체 연구직에 대해 근로시간 유연성을 높여주자는 것인데 지나칠 정도로 건강권만 강조하고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삼성전자 노조도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대기업 노조들은 자사의 생산활동을 돕기 위해 장시간 연장근로를 수용하는데 반해 삼성노조는 워라밸 타령만 외친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근로시간 유연화는 꼭 필요하다. 노동계와 민주당은 워라밸 타령만 할 게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반도체특별법을 처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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