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와 이어진 탄핵 정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리스크 등 국내외 각종 악재 속에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속속 철수하고 있지만, 기관 투자자들은 거꾸로 국내 주식 순매수 행진에 나서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4일부터 이날까지 기관 투자자들은 코스피에서만 2조495억 원가량을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개인이나 외국인은 각각 1조3910억 원, 1조550억 원 매도 우위였던 것과 대조된다.
기관들이 청개구리 같은 ‘바이(Buy) 코리아’ 행보를 보이는 이유를 파악하려면 순매수 상위 종목 면면을 훑어봐야 한다. 이들은 최근 5거래일 사이 삼성전자(4763억 원), SK하이닉스(2212억 원), 카카오I(1173억 원), KB금융(1050억 원), 네이버(904억 원), 기아(864억 원), 신한지주(636억 원), 현대차(547억 원) 등을 주로 쇼핑했다. 전기·전자 업종, 금융업종 등 시총 상위 업체 이름이 많이 보인다.
최근 주가 하락으로 커진 가격메리트와 밸류업에 배팅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자동차는 주주 환원을 통한 기업 가치 가치 밸류업을 위해 자기주식(자사주) 1조 원어치를 사들인다. 지난 8월 열린 ‘CEO(최고경영자) 인베스터 데이’에서 밝힌 3년간 4조 원 규모 자사주 매입 계획의 일환이다. 최근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지난 15일 10조 원 규모 자사주 매입 소식을 밝힌 데 이어 LG그룹, SK그룹 등이 잇따라 밸류 업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는 투자자들에게 “밸류업은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대외신인도 유지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정부의 시장 안정 주문에 움직였다는 시각도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날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김병환 금융위원장·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F4(Finance 4)’와 함께 긴급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열고 “기관투자자의 매수가 지속되고 외국인의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는 모습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며“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책임 있는 역할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위원회는 겨엄령 사태 이후 5대 금융지주와 비금융지주계열 증권사 등의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만나 건전성·유동성을 점검하고 있다.
변준호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2019년 코스피 12개월 선행 주가순자산비율(P/B)이 0.76배까지 하락했다”면서 “현재 0.8배를 밑도는 주가순자산비율이 더 낮아 질수 있다”고 했다.
한국증시가 더 싸지면 연기금이 살까.
수치만 보면 구원투수 역할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지난 8월 기준 국민연금의 자산군별 비중에서 국내 주식은 13.2%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목표 비중(15.4%)보다 낮다.
금융투자사들의 저가 매수도 기대해볼 만하다. 6일 기준 국내 주식형편드 설정액은 51조6691억 원이다. 연초대비 4조3702억 원이 늘었다. 삼성전자 등을 중심으로 ‘저가 매수’할 실탄에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관에 증시 안전판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복병이 많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은 기관들의 본격적인 시장 참여를 논하긴 이른 시점”이라며 “지속적인 매수세가 유입되려면 대외 환경이 안정되고, 무엇보다 반도체 업황이 돌아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도 동력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있다. 김윤정 LS증권 연구원은 “밸류업 프로그램의 롤 모델인 일본은 10년간의 기업 지배구조 개정 노력이 있었다”며 “연속성 있게 장기간의 노력을 들여야 안착이 가능한 정책 과제가 비상 계엄 사태 이후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