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미끼 던지고 기술만 쏙 빼가”…진화하는 기술유출 범죄들 [산업스파이, 구멍난 법망]

입력 2023-09-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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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기술유출 범죄가 치밀하게 진화하고 있다. 디지털 자료를 빼돌리는 것이 기존의 수법이라면 최근에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범행이 고도화되는 양상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신종 기술유출 범죄가 등장하는 가운데 수사기관과 법원은 꾸준한 연구를 통해 적발과 근절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LG에너지솔루션 전직 직원 정모 씨가 회사의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 씨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LG에너지솔루션 영업비밀을 촬영한 뒤 자문중개업체를 통해 자문료를 받고 기술을 누설했다.

정 씨가 그렇게 약 10억 원의 자문료를 챙기는 동안 LG에너지솔루션의 2차전지 연구개발 동향과 로드맵 등 영업비밀은 밖으로 빠져나갔다. 통상적인 영업비밀 유출은 경쟁업체로 이직 과정에서 직접 내부 기밀을 빼돌리는 방식이지만, 이번 사건은 자문중개업체를 통해 기술이 오가는 신종 수법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허위 자문업체를 직접 설립한 경우도 있었다. 콘크리트혼화제 분야에서 시장을 선도하는 한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던 김모 씨는 영업비밀 자료를 USB에 담아 퇴사했다. 이후 같은 분야지만 시장에서 입지가 좁았던 경쟁사로 이직했다. 이미 기존 회사와 영업기술을 두고 법적 분쟁이 발생할 것을 예상한 김 씨가 경쟁사 대표와 만나 사전에 전략을 세운 뒤였다.

김 씨는 직접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경쟁사와 자문계약서를 체결했다. 고정 자문료 월 545만 원, 자문인센티브 매출의 1% 등 구체적 사항도 명시했다. 실제로는 경쟁사에 출근한 김 씨는 빼돌린 기술자료를 통해 콘크리트혼화제 신제품을 개발했다. 법원은 2016년 6월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기술유출 사건 처리 경험이 있는 한 부장검사는 “기존의 일반적인 기술 유출 방식은 USB에 기술 관련 파일을 옮겨 빼돌리거나 재택근무를 하며 연결된 회사 컴퓨터로부터 자료를 열어 사진촬영 하는 방식”이라며 “직후 곧바로 회사를 옮겨 적발이 쉬웠다면 최근에는 기존의 유형에서 벗어나 진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불법인지 아닌지 모호한 방식으로 회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가령 회사 PC에서 핵심 기술이 담긴 문서를 눈으로 보고 암기한 뒤 회사 밖에서 그 정보를 구현하는 식이다. 직접 기술을 습득한 직원이 회사 밖에서 단순히 재현하는 방식이어서 일부 피해 회사들은 “이런 것도 범죄가 되냐”며 신고를 망설인다고 한다.

(이투데이DB)

단순 거래를 명분으로 접근해 기술을 빼돌리는 사례도 있다. 터치패널 제조사의 기술 정보를 중국의 동종 업체에 판매하기로 마음을 먹은 한모 씨는 터치패널 제조 회사에 연락해 “동생이 필름사업을 하는데 저렴하게 공급하면 좋을 것 같으니 필름 샘플과 데이터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피해 회사 직원은 영업비밀이 담긴 필름의 ‘데이터 시트’를 제공했다. 이 기술은 당시 정부가 고시한 ‘복합 Plate 기술’이며 산업발전법 5조에서 정하는 첨단기술에 해당된다.

2015년 재판부는 한 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 회사의 주요한 영업비밀이자 산업기술”이라면서도 “피고인들은 초범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점, 누설한 영업비밀로 인해 피해자에게 별다른 손해가 발생하지 않은 점 등을 참작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벤처투자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의 IR(기업설명) 자료를 많이 받는데, 자료를 검토하다가 다른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아이디어를 몽땅 전달해 준 사례를 들었다”며 “IR 과정은 투자 계약을 전제로 상호 간 자료를 탈취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묵시적 계약도 민법상 계약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회사의 경영권 확보나 인수‧합병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우회적으로 기업의 자료를 확보하고 빼돌리는 경우들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앞서의 부장검사는 “다행히 이러한 신종수법에 수사기관가 법원 모두 심각한 범죄로 보고 엄벌에 처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산업계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기술유출에 대한 인지가 다소 늦어 계속 범행이 발생하고 있다”며 “수사기관과 법원, 산업계 모두가 발전하는 범죄에 맞춰 지속적인 연구를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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