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회장', '퇴물 지식인'…백현진 “너무 싫어하니 연기 쉽더라”

입력 2023-04-28 18:48수정 2023-04-28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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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 플러스 전주 호텔에서 열린 'J 스페셜 :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백현진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드라마 ‘모범택시’의 갑질회장, ‘가우스전자’의 꼰대 차장,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퇴물 진보지식인…. 쇳소리 섞인 듯 까칠한 음색에 마주보기엔 어딘지 불편한 고압적인 눈빛, 백현진이라는 세 글자 이름은 몰라도 한 번쯤 스쳐 지나간 드라마 속 빌런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라면, 잊기 쉽지 않은 존재감이다. 주변에 두기 싫은 비호감 군상을 마치 실존인물인 양 연기하는 실감나는 표현들을 쉽게 지나치기 어려워서다.

28일 백현진에게 ‘비호감 연기’를 유독 잘 소화하는 연유를 물었다. 베스트웨스턴플러스 전주호텔에서 열린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소위 ‘꼰대’나 ‘한남’들을 끔찍히 싫어해서 (도리어) 적을 잘 아는 거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연기했다”며 웃었다.

성착취물을 대거 유통한 범죄자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회장을 모델로 삼았던 ‘모범택시’ 속 갑질회장 역은 본인 말로도 “씽크로율 쩐다”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다. 정작 역할을 준비할 때는 당사자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가 곧장 껐을 정도로 불편함이 컸다고 한다.

“유튜브에 그 사람 이름을 검색해 봤는데 직원들을 때리는 장면이 나와서 바로 껐어요. 못 견디겠더라고요.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빌런 역할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제 오랜 지인들은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모범택시’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꼭 실제 인물을 참고할 필요는 없다는 답을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대신 “최대한 아저씨처럼 입혀 달라고 했고, 분장팀에게 M자(탈모)를 더 도드라지게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아마 ‘씽크로율 쩐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백현진은 27일 개막한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 프로그래머 자격으로 공식 행사를 소화한다. 직접선정한 스페인 출신 루이스 부뉴엘 감독(1990~1983)의 3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과 자신이 출연한 ‘뽀삐’(2002), ‘경주’(2014) 등을 관객 앞에 다시 선보인다.

▲ 김지현 감독 '뽀삐'에 출연한 백현진. (사진 제공 = 전주국제영화제)

문석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제안을 받고 역할을 수락했다는 그는, 만약 누군가의 작품을 평가하고 당락을 결정하는 심사위원 자격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4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쟁에 완전히 신물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렵게 들어간 홍대 조소과를 중퇴했다.

“경쟁 구도를 피해서 살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15년 정도는 ‘청년 예술가’로 살았는데, 어떻게 먹고 살지 늘 불안했죠. 그런데 회사도 다니기 싫고, 아르바이트도 하기 싫어서 최대한 검소하게 살았어요.”

간혹 영화잡지에 삽화를 그려 보내는 정도의 일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어들이며 하고싶은 예술 작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90년대 후반 장영규와 함께 어어부밴드를, 2010년도 중반 방준석과 ‘방백’을 결성하며 음악활동을 하며 독립음악계의 팬덤을 양성했고, 그림 작업에도 탁월한 성과를 보이면서 국내외 갤러리가 선호하는 유명 작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한 우물을 파서 근성 있게 일하라’는 삶의 태도를 관습적 진리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자기 예술세계를 구축한 셈이다.

“30대 중반부터 50살이 된 지금까지 약 15 간은 굉장히 운이 많이 따라줬다”고 표현했지만, 그의 자유로운 성향이 독특한 성과를 끌어냈음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는 “이제는 많이 벌고 그해에 다 써서 재산은 없지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했다.

백현진은 2020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출연을 시작으로 드라마 ‘모범택시’, ‘악마판사’,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등에 연이어 출연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그중에서도 자신 있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최근 2~3년의 활발한 활동으로 비로소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그는 이날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국내 영화제에 바라는 소망도 전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배우의 한사람으로서 심각하고 진지한 프로그램을 용감하게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전주 = 박꽃 기자 p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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