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금융기관, SVB 모델 벤치마크 금융서비스 일부 손실”
“韓 벤처 생태계, 정책금융 의존도 높고 IP금융 비활성화”
미국 은행규모 16위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한 가운데, 한국식 SVB 모델 도입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와 이목을 끈다. SVB 파산으로 금융당국의 특화은행 도입에도 ‘신중론’을 요구하는 목소리 커질 것으로 보인다.
14일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이효섭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11월 ‘실리콘밸리은행그룹 모델의 국내 도입 가능성 진단’ 보고서에서 SVB 사업모델의 국내 도입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SVB는 실리콘밸리 지역 내 기업과 임직원으로부터 예·적금을 수취 받아 유망 벤처기업에 대출해주는 업무를 주로 수행해 왔다. 일반 은행대출은 기업이 보유한 유형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수행하지만, 벤처대출은 벤처기업이 보유한 특허, 영업권, 미래 현금흐름 등을 담보로 대출을 제공하거나 담보 없이 대출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벤처대출은 일반 은행대출보다 부실 위험이 크며 대출 이자율도 높게 측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고서는 한국 벤처기업 생태계가 신용보증 등 정책금융 의존도가 높고, IP금융이나 세컨더리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점 등 미국 벤처기업 생태계와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국에서 SVB식 사업모델이 당장 성공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정책금융기관들도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등 보증연계투자, 투자옵션부보증 등 SVB 그룹의 사업모델을 벤치마크한 투자·융자 결합 금융서비스를 제공해왔다”면서 “아쉽게도 SVB식 사업모델과 유사한 보증연계투자, 투자옵션부보증 등은 활성화가 미진하며 해당 투자·융자 복합 프로그램을 제공한 정책금융기관들도 일부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설명했다.
2016~2020년 기술보증기금과 신용보증기금이 수행한 보증연계투자규모는 두 기관을 합쳐서 연간 약 100여 개 기업에 대해 700억~900억 원에 불과하다. 한국의 보증연계투자규모는 1개 업체당 5억~10억 원 내외로 글로벌 벤처대출의 평균금액(300억~500억 원 내외)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다. 그뿐 아니라 기술보증기금과 신용보증기금 모두 보증연계투자 부문에서 손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부 정책금융기관의 경우 보증연계투자 부문의 손실이 확대되고 있다.
이 연구원은 SVB식 사업모델이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로 미국과 다르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정책금융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국내 벤처기업들이 정책금융기관의 보증기반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어 높은 이자 비용을 내고 벤처대출을 활용할 유인이 크지 않다”라고 했다.
한국벤처기업협회가 2020년 신규로 자금을 조달한 3만5000개 벤처기업으로부터 자금조달 유형을 조사한 결과, 정부의 융자·보증 등 정책지원금 형태가 전체의 64.1%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모험자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벤처캐피탈, 엔젤투자자로부터 조달받는 비중은 2.2%이며 회사채 발행 비중은 1.1%에 불과했다.
민간 금융회사가 SVB식 사업모델을 도입하는데 금전적 유인체계가 부족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국내 IP금융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벤처기업이 보유한 무형자산을 담보로 활용하기 어렵고, 독립형 워런트를 발행하는 것이 금지돼 있어 민간 금융회사가 벤처기업으로부터 지분 워런트를 수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연구원은 “한국에서는 세컨더리 시장이나 고수익 회사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벤처대출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회수가 어려운 점도 민간 금융회사가 SVB식 벤처대출을 수행하는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짚었다.
한편, SVB 파산으로 금융당국의 특화은행 도입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금융위원회는 이달 초 신규 은행 추가 인가 방안을 논의하며 소규모 특화은행 사례로 SVB를 꼽은 바 있다. 당시 금융위는 “미국 SVB는 별도 인가 단위에 따른 특화은행은 아니지만 사실상 고위험 벤처기업만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특화은행처럼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SVB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 불능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파산하면서 금융당국의 논의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고강도 긴축 상황 등 경기 변동과 리스크 관리에 취약하다는 특화은행의 약점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