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를 벤츠라 못하고…" 화면해설작가 희로애락 담은 '눈에 선하게'

입력 2022-11-03 12:09수정 2022-11-0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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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선하게'를 공동집필한 김은주, 홍미정, 이진희 작가 (박꽃 기자 pgot@)
“원 안에 삼각별 모양의 엠블럼이 있는 고급 외제 차”

“자동차 보닛 위 방패 모양 안에 말 그림이 있는 엠블럼”

영상은 전혀 보지 못한 채 이런 해설을 귀로 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자동차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을까. 첫 번째 답은 좀 쉽다. 벤츠다. 두 번째 답은? 망설여진다면 정상이다. 포르쉐다. ‘아, 그 엠블럼이 말(Horse)이었어?’ 하는 독자, 지금도 꽤 있을 거다. 한 가지도 더 알게 된다. 시각장애인은 때로 어쩔 수 없이 이런 추상적인 설명에 기대어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야 한다.

2일 오후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신간 ‘눈에 선하게’를 펴낸 김은주, 이진희, 홍미정 화면해설작가를 만났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이 귀로 드라마나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영상을 해설해주는 원고를 쓰는 동료 작가 5명이 함께 모여 책을 냈다. 생소한 화면해설의 세계를 알리고 그 업의 희로애락을 상세히 풀어낸다.

“그런 차가 한 대만 나오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영화 ‘퍼펙트맨’에서는 벤츠, 그랜저, 포르쉐, 롤스로이스, 페라리, 재규어가 대량 방출되거든요. 이걸 만약 추석 특선영화로 TV에 방영하게 되면, A와 B가 어떻게 다른 외제차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죠”

홍 작가는 화면해설 영상에서 간접광고가 된다는 이유로 특정 브랜드를 ‘외제 차’, ‘명품 가방’ 식으로만 뭉뚱그려 표현하도록 규제하면 오히려 시각장애인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일종의 차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상업영화 ‘허스토리’에서 할머니 배에 일본군이 새겨놓은 ‘조센삐’라는 문신이 나온다. 본 영화에서 그 뜻 그대로 욕설이 섞인 비하표현이 한글자막으로 처리돼 관객이 잔인했던 역사적 사실에 충격을 받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면, 화면해설 영상에서는 ‘조선창녀’로 표현됐다. 감독의 연출 의도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날 ‘봉오동 전투’, ‘미나리’ 등 장르 다양한 영화를 화면해설한 김 작가는 “지금은 모든 심의 규정이 통합돼있다. 앞으로는 화면해설에 별도로 심의 규정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액션 영화의 계보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악녀’ 당시 화면해설의 고충은 흥미로움 그 자체다. 권성아, 김은주, 홍미정 작가 3인이 공동 작업한 ‘악녀’를 두고 홍 작가는 “그 작품은 정말 대박이었다”며 웃었다.

홍 작가는 “앞부분에 무려 8분 동안 ‘으악’, ‘악, ‘푹’ 같은 소리밖에 없었다"면서 "오프닝 타이틀이 나올 때까지 주인공 김옥빈 얼굴이 안 나오니까 누가 칼로 찌르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칼로 찌르고 있다’고 쓸 수는 없으니 이렇게 썼다, 저렇게 썼다 종일 고친 것”이라고 기억했다.

해당 원고는 “(02:10 탕! 1번 듣고) 여자가 반격하는 조직원을 다시 걷어차고/ 탄창을 바꿔 끼우며 계단을 올라간다. (탕!)” 같은 식으로 완성됐다.

‘천만영화’로 손꼽히는 ‘신과 함께’를 화면해설한 권 작가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책에 썼다. “일곱 개의 지옥마다 받는 형벌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해설할까 염려됐다”고 한다. 제대로 된 화면해설이 없으면 제아무리 ‘천만영화’라도 누군가는 전혀 즐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정확한 표현을 골라내려 했다.

이들이 고심 끝에 완성한 원고는 전문 성우에게 전달돼 녹음된다. 그렇게 완성된 시각장애인용 화면해설 영상은 TV 재방송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 등을 통해 공개된다.

우리나라 방송사업자는 연간 5~10%의 화면해설 방송을 의무적으로 편성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소외계층 미디어 포용 종합계획’을 발표해 2025년까지 VOD와 OTT도 화면해설 영상을 의무 제작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홍 작가는 "화면해설이 도입된 지 22년이 지났지만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고들 한다. 1년에 400편 가까이 상영하는 부산국제영화제도 화면해설 버전은 10편 정도밖에 제작하지 않는다. 아무리 적어도 10%는 해야 한다. 장애인의 미디어 접근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가는 이날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시각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우리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라면서 “그 길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그가 책에 쓴 문장에는 그 마음이 잘 담겨있다.

“우리가 이렇게 끝없이 (영상을) 살피고 놓치는 게 없는지 꼼꼼하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시각장애인이 단숨에 흡수하는 시각 정보를, 시각장애인에게도 최대한 많이 전달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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