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 국제경제부 기자
러시아가 산산조각낸 것은 우크라이나의 평화만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지난 75년간 누렸던 ‘행복한 휴가’도 앗아갔다. 1944년 7월 이후 국제사회는 미국이 설계한 전략적 환경인 ‘브레턴우즈 체제’ 덕에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뒤늦게 2차 대전에 뛰어들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손아귀에서 국제사회를 건져낸 미국은 과거 제국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다. 자유무역과 안보 동맹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자국에 대한 접근을 자유롭게 허용하면서 ‘적’으로부터 안보까지 보장해주니, 전 세계는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정학, 자원, 기술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은 같이 발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사회는 다시 ‘정글’로 내던져졌다. 1989년 냉전 종식과 함께 안보 위협이 사라졌다는 믿음이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되면서다. 세계는 러시아 같은 침입자가 언제든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고 나섰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우리는 새로운 안보 현실에 눈을 떴다”며 “안보에 투자할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안보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고, 안보 보장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자유무역도 종말이 불가피해졌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저서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에서 자유무역 질서의 대대적인 전환이 진행 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유무역이 쇠퇴한 국제질서에서 지정학은 부활하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도 “전 세계 불안정이 심화하고 있고 열강들의 충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정글’로 변해버린 세상에서는 격렬한 이합집산이 판을 칠 것이다. 가치, 이념에 따른 동맹·연합보다 이해와 실리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혹한 현실정치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조짐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안보 보장을 약속한 미국이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와 밀착에 나섰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허물없는 친구’라 부르며 석유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꺼내 들었다. 석유 대금을 달러로만 결제하는 일명 ‘페트로 달러’ 질서에 반기를 든 것이다.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값어치’를 증명해야 한다. 안보든 경제든 동맹의 대가로 줄 게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합집산의 세상에서는 지정학과 기술, 자원이 다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도가 러시아 원유를 싼값에 사들이며 ‘밉상’을 떨어도 서방 지도자들이 쪼르르 달려가 어르고 달래는 이유다. 미국은 전략 보고서에서 미래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인도·태평양을 꼽고 있다. 인도는 그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다. 대만은 세계 최대 반도체 기술력으로 ‘몸값’을 올리고 있다.
자원이 부족하고 지정학적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한국의 최종병기는 무엇인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0ju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