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학교식물원 원장·신구대학교 원예디자인과 교수
일터인 식물원 사무실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무실 문만 나서면 식물원의 정원들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다른 사람들과도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있어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식물원을 일터로 둔 특권이 아닐까 스스로 행복해하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에서야 사회적 거리두기 개념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나무들은 이미 오랫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에 대한 발견과 연구가 시작된 것도 30년이 넘었습니다.
나무들 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수관기피’라는 용어로 표현됩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가지와 잎의 모둠인 각 나무의 수관들이 서로 닿지 않고 일정 공간을 남겨두는 것을 말합니다. 수관기피 현상은 보통 비슷한 나이의 나무가 함께 자랄 때, 특히 같은 종류의 나무들 간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이 현상은 코스타리카의 맹그로브 숲에서 처음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그 외에도 많은 나무들에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가 이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관기피 현상의 원인에 대해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식물이 햇빛을 골고루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빛을 충분히 받기 어려운 숲 환경에서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고, 더 쉽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틈이 생기면 나무 아래까지 충분히 햇볕이 닿을 수 있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슷한 설명으로, 잎이 겹치게 되면 광합성에 중요한 빛의 부족으로 인해 나무의 가지와 잎이 자라지 못해 수관 사이의 공간을 채우지 못한다고도 합니다.
두 번째 설명은 꼭대기의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혀 서로 마모되면서, 자연적으로 가지치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는데, 연구 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맹그로브가 많을수록 이웃하는 나무들 간의 수관 간격이 더 넓어졌습니다. 반대로 인접한 소나무가 흔들리지 않도록 밧줄을 이용해 고정한 후에는 소나무들의 수관이 인접한 수관과의 틈을 채웠습니다.
세 번째 설명은 나무가 이미 불필요한 낭비를 피하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조직을 키우려면 식물은 매우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웃한 나무들과 경쟁하게 되는 수관 가장자리에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라는 것을 중지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발전된 설명으로, 일부 나무는 특수한 감각 시스템을 활용하여 주변 식물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을 감지하고 생장의 지속과 정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수관기피에 대한 마지막 설명은 원인을 설명한다기보다는 효과에 가깝습니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서 수관 사이에 틈이 생김으로써 해충 또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수관기피는 나무세계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식물이 서로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막으면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것이야말로 나무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인 공간을 갖는 효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나무들의 사회적 거리두기인 ‘수관기피’를 영어로 ‘수관(crown) 수줍음(shyness)’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수줍어서 수관이 서로 가까이 붙지 않는다고 생각한 과학자들의 인간미가 돋보입니다. 수줍어서 가까이 가지 않든지 건강을 위해서 가까이 가지 않든지, 감염병에 관계없이 서로 간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은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신건강 측면을 포함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