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경제·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상위 개념이다. 정치가 뜻하는 바 모든 걸 할 수 있다. 그래서 유권자들의 기대가 모아진 집단선(集團善, collective good)이어야 한다. 영국 정치과학자 콜린 헤이의 명제다. 하지만 실상은 늘 거꾸로다. 정치인들 대다수가 세상 문제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아무 곳에나 끼어들고, 유권자들이 위임한 권력을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데 남용한다. 국민의 피땀인 세금을 엉뚱한 곳에 물 쓰듯 하면서 저 혼자 생색내는 정상배(政商輩)다.
정치가 오도(誤導)된 포퓰리즘에 갇힌 탓이다. 대중영합이 대의민주주의의 바탕인 건 한계다. 문제는 대중의 참된 요구를 모아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회를 개혁해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참된 포퓰리즘이 현실에 없다는 점이다. 공익은 무시되고, 국민을 팔아 어떻게든 권력을 쥐어 제 몫만 챙기겠다는 퇴행적 포퓰리스트들뿐이다.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 총선이 일주일여 앞이다. 1980년대 민주화 이래 최악의 선거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제1 야당을 배제하고 군소 정당과 야합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괴상한 선거법을 만들었다. 거대 정당의 독식구도를 깨고, 소수 정당의 국회 진출로 다양한 민심을 반영하자는 명분은 거창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난장판이 그 결과다. 온갖 꼼수가 동원된 ‘떴다방’ 위성정당이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기(詐欺)다.
이번 총선은 문재인 정권 3년의 중간평가다. 그럼에도 코로나19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민주당은 ‘코로나 국난의 극복’을 내세운다. 사태 초기 정부의 오판(誤判)과 헛발질로 궁지에 몰렸다가 이제 상황이 유리해졌다고 보는 것 같다. 정부도 국민 70%에 긴급재난지원금을 살포키로 하는 등 뒤를 받친다.
여당은 미국·유럽 등에서 감염자가 폭증하고 대혼란에 빠지자, 우리가 코로나 방역의 성공사례라고 자랑한다. 인지능력이 의심스럽다. 그들이 한 게 뭐 있나.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모범은, 수십 년 다져온 선진 의료시스템과 감염병 대응역량, 싼 비용으로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건강보험제도, 감염 위협과 탈진 상태에도 몸을 던지고 있는 의료진, 그들을 격려하고 불편을 견디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시민의식이다. 국민이 그나마 신뢰하는 건,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이 ‘영웅’으로 부각시킨 정은경의 질병관리본부가 오롯하다.
야당은 정권의 경제 실정(失政)에 대한 심판론이 프레임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드는 울림이 없다. 정권이 오만과 독선으로 나라 경제를 망가뜨린 소득주도성장, 탈(脫)원전, 부동산 정책 등 실패가 넘치지만 코로나에 모두 묻혔다. 무엇보다 야당의 대안 부재 탓이 크다. 비판을 넘어, 국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파괴력 있는 비전이 안 보인다. 국정 철학과 정치적 창의력의 빈곤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공약이 뭔지도 잘 모른다. 하긴 공약 보고 찍는 정상적 선거판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 지역과 세대 갈등만 부추기는 무조건적 편가르기의 싸움이다. 10일과 11일 사전투표가 이뤄진다. 유권자들이 이번에는 투표하는 일도 쉽지 않다. 마스크 챙기고, 1m 거리 지켜 줄서서 발열 검사받고, 손 소독제 꼼꼼히 바른 뒤 비닐장갑 착용하고, 길이가 50㎝나 되는 투표용지에서 수십 개 정당 중 한 곳을 골라 찍어야 한다. 외국에서 돌아와 자가격리 중인 사람들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도 없다.
국민에 대한 배신을 밥먹듯 하는 정치이고, 이번 선거 또한 차악(次惡)의 선택이지만 그래도 투표는 꼭 해야 한다. 매번 속아도 이 나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유권자들의 표밖에 없다. 저열(低劣)한 인간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시대의 사상가였던 함석헌 선생은 “정치(선거)는 덜 나쁜 놈을 뽑아 쓰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외면하면 가장 나쁜 놈들이 다 해먹게 된다”고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