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제 사명감 대신 열린 소통·자신감
삼성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 ‘호암자전’을 통해 밝힌 1983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각오다.
36년이 지난 올해 초, 호암의 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업황을 묻는 문재인 대통령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한다.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
재계 오너 3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기업 투자 패턴이 바뀌고 있다.
이병철·이건희·정주영·정몽구·구본무 등 그룹을 일군 1~2세대 총수들은 국가 경제 발전이란 ‘의무감’ ‘사명감’을 어깨에 진 채 투자 및 사업확장에 나섰다.
그러나 후세 총수들은 자신들이 세계 경영 환경 변화를 직접 살피며 선도 투자에 나선다.
젊은 시절 해외유학 등을 거쳐 글로벌 트렌드를 습득한 상황에서 자신감을 갖춘 일종의 펀(fun)한 투자로 경영환경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비장함’과 대비되는 이재용 부회장의 ‘자신감’이 바로 그 예다.
이 부회장은 ‘진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시스템반도체에 10년 간 133조 원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세대교체를 이룬 젊은 총수들이 이른바 ‘유포리아(euphoria)’투자로 경제 지도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포리아는 도취감 등을 의미한다. 혁신경제 전문가인 미국의 윌리엄 제인웨이는 한 인터뷰에서 “시장경제 역사에서 어떤 기술에 대한 유포리아가 없으면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 총수는 선대 경영인이 맨땅에서 회사를 일궈 피폐했던 나라 경제를 발전시킨 것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롭게 자랐다.
그러다 보니 열린 소통 방식으로 사업 구조조정과 미래 먹거리 발굴에 나선다. 의사결정도 빠르고 과감하다.
해외 유학 등으로 일찌감치 글로벌 감각을 갖춘 만큼 인재 영입도 파격적이다. 기존 틀에 박힌 규칙은 던져 버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기업 전통인 순혈주의를 깨고 외부에서 주요 계열사 CEO를 영입하고, 경쟁사의 기술을 사들였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수소전지차에 대한 자신감을 꾸준히 보여준다. 임직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업전개 방향에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총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젊은 재계 총수들은 선대 경영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며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유연하고 빠른 경영으로 기업의 체질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