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겪고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도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흙수저가 금수저로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개천에서 나온 용을 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경제위기가 가져오는 구조조정, 비싼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나라로 이전하는 공장, 세계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산업, 정보통신의 발전과 자동화. 이러한 원인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고 빈곤으로 떨어진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이전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책임을 개인으로만 돌리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한 부문에서의 문제가 다른 부문으로 전이되어 사회 전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한 부문의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포용사회가 중요한 것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2위라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곳곳에 지뢰처럼 묻혀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발전과정에서 소외되고 낙오된 사람들과 함께 가야만 한다.
그 한가운데 금융이 있다. 금융은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제 경제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기에 그라민은행의 유누스 박사는 금융 접근권을 인간의 기본권의 하나로 칭하기도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경험한 우리들이 터키의 금융위기를 우려하는 것은 지구 한편에서 발생한 문제가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심각한 금융소외 문제는 우리 사회를 마비시킬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며칠 전 세상을 달리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은 빈곤층이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금융산업의 서비스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제약을 풀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게 도와주는 포용적인 금융산업을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용적 금융은 금융 소외계층에게 합리적 비용으로 다양한 금융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융 취약계층에게 무조건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서민금융을 실현한다고 무분별하게 금융 지원의 양을 확대하고 부채를 면제해주는 것은 대출과 탕감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정상적인 금융을 이용할 수 없는 금융 취약계층에게는 상담과, 채무 조정 등의 절차를 거치면서 금융의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는 금융을 금융의 시각으로만 보지 말고 복지적 방법론이 결합된 복지금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용적 금융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자선적이고 소극적인 접근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시스템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