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석좌교수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가 활동했던 이 도시는 돌로 만든 고색창연한 궁전과 박물관으로 가득하다. 이 위대한 수학자는 특출한 재능에도 고국인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는 데 실패하고 낙담해 있다가, 러시아 제국학술원의 초빙에 응해 1727년에 부임했다.
러시아 페테르 대제는 즉위한 뒤 18개월 동안 서유럽 각국을 순방(Grand Embassy)하고는 앞선 문물을 따라잡겠다고 모진 결심을 했다. 그 자신도 배 건조법을 익혀서 강력한 러시아 해군 건설의 동력으로 삼았고,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서 수도를 옮겼으며, 서유럽의 학문적 전통을 따라잡기 위해 제국학술원을 설립했다. 후한 대우와 연구 환경을 제공하면서 세계 여러 곳의 인재를 모았다. 이런 인재 초빙 정책이 직장을 찾던 오일러를 구원했고 수학의 역사를 바꿨다.
오일러는 다작의 수학자였다. 엄청난 분량의 논문을 썼지만, 그의 저술 중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은 프로이센의 샤롯데 공주에게 보낸 200여 개의 서신을 모은 책이다. 프레더릭 왕의 요청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게 된 독일 공주에게 교육을 위해 보낸 서신인데, 보통 사람의 눈높이로 수학적 통찰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위대한 과학자가 대중적 글에도 능했던 사례랄까.
널리 인재를 모은 사람의 원조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 1세다. 고대 그리스의 중심을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긴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에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 총독을 지내던 중에 즉위했다. 그는 그리스 학교의 문화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세움을 벤치마킹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건립했다. 당시 7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은 범인의 상상을 넘는 인류 문명 최대의 규모였다.
하드웨어만 있으면 뭐하랴. 그는 전 세계의 학자들을 파격적인 대우로 초빙했다. 천문학자 프톨레미 같은 인재들이 결집하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리아는 900년 동안 세계 문명의 중심지가 됐다.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일러는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를 연상시킨다.
알렉산드리아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학자들이 모이자 용광로 효과가 일어났다. 플라톤 학파에서는 피안의 세계를 보는 창으로 기하학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인류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데에 응용하는 것을 경시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남단의 항구도시로 교역의 요충지였고, 새롭게 사회의 중추로 등장한 자유 시민 계층은 수학의 성취를 항해와 별자리 관측에 기꺼이 사용했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학자들은 열정적으로 이를 지원했고, 사유의 순수성에 집중하던 아테네 시대의 학문 활동은 어느새 사회 문제 해결의 최전선으로 이동했다.
널리 인재를 모아 변화를 만든 사례는 이렇게 역사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