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30. 대목왕후(大穆王后)

입력 2017-01-1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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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의 제1비, 왕의 정치에 균형을 더하다

대목왕후(大穆王后, 생몰년도 미상)는 광종의 제1비로, 태조와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딸이다. 태조의 딸이니 당연히 성씨가 왕씨여야 하지만 동성혼을 했으므로 어머니의 성을 취해 황보씨라 하였다. 이는 매우 신선하다. 우리는 흔히 전통시대에는 당연히 아버지의 성씨를 따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가족법 개정론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어머니의 성씨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에 성씨의 선택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씨의 변경은 고려시대 왕비들에게 일상사였다. 고려 왕실은 다처제였고, 그중 최소한 1명 이상을 종실에서 택했으므로 동성 왕비가 많았다. 이들은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성씨를 칭해 동성혼이 아닌 것처럼 하였다. 이는 단순히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 그 성씨집단의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대목왕후의 남편이었던 광종은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호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은 물론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그들이 가진 사병을 억제하고 국가의 근간인 양인의 수를 늘리고자 하였다. 고려사에는 노비안검법이 실시되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많았으며, 윗사람을 무시하는 기풍이 성행하여 사람들이 다 원망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왕후가 간절히 왕에게 간하였으나 광종이 듣지 않았다 한다.

왜 왕후는 광종의 정책을 저지하고자 하였을까? 일단 대목왕후의 외가가 대표적 호족세력인 황주 황보씨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왕비가 친족의 몰락을 두고보기 어려웠다는 점이 작용했으리라. 또 한 가지 이유는 광종에게는 그녀 외에 또 한 명의 왕비인 경화궁부인 임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광종을 제어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경화궁부인은 혜종의 딸이다. 혜종은 본디 외가가 미약하여 박술희의 후원으로 겨우 왕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가 호족의 입장에 선다든지 왕과 척을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대목왕후는 딱히 광종의 정책에 반대를 해서라기보다 반대측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왕의 정치에 균형을 주고자 한 조언자로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그녀는 오래 산 것 같지 않다. 광종의 무리한 호족 억제책은 광종 사후 부작용을 낳는다. 아들 경종은 살아남은 호족의 자손들에게 ‘복수’를 허락하고, 정국은 다시금 어지러워진다.

대목왕후는 광종과의 사이에서 고려 5대왕 경종(왕주)과 효화태자,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문덕왕후를 낳아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그녀가 사망하자 대목왕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1002년에 안정(安靜), 1014년에 선명(宣明), 1027년에 의정(懿正) 및 신경(信敬), 1056년에 공평(恭平), 1253년에는 정예(靜睿)라는 시호를 각각 추가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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