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특수+강남개발 ‘건설’ 묻지마 매수…1등 ‘삼보증권’도 무너져
지금에야 이름이 많이 잊혀졌지만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이 키워낸 삼보증권은 1970년대까지 국내 증시의 독보적인 1등 증권사였다. 그러나 이렇게나 잘 나가던 증권사도 ‘건설주 파동’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국내 증시의 최대 암흑기로 기록된 건설주 파동은 1970년대 중동 건설붐을 타고 급등했던 주가가 1970년대 후반 갑자기 폭락했던 사태라고 정리할 수 있다. 건설주 파동의 배경은 제1차 오일쇼크(1973~1974년) 이후의 ‘중동특수’였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동지역 국가들이 경제개발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건설업체들이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한 것.
건설사 호황은 주식시장의 유동성과 맞물리며 건설주 붐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부 건설주들의 경우 500원짜리가 한 달 이상 상한가를 지속해 3만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회사 이름에 ‘건설’만 들어가면 무조건 매수를 하는 상황이어서 페인트 제조회사인 ‘건설화학’에 묻지마 매수가 쏟아졌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전해진다.
여기정부가 ‘과밀화된 강북 인구를 분산한다’며 강남 개발에 착수한 것도 건설주 과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 결과 1975∼76년에 건설주는 연평균 200%를 넘는 상승률을 보였고, 1977년에는 135%, 1978년 들어서도 상반기 중에만 99%의 기록적인 상승률을 기록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한국거래소는 33개 건설 종목을 감리종목으로 지정하고 가격제한폭을 30원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거래량이 줄어들자 오히려 투기가 확대돼 건설주는 더욱 가파르게 상승했다. 시장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우려했던 문제가 터졌다. 끝없이 올라가기만 할 것 같던 건설주 주가는 1978년 6월28일을 정점으로 다시 추락했다. 하지만 6월 말부터 증권거래세 신설과 시가발행제도 도입 등 규제정책을 잇따라 쏟아내기 시작했고 유상증자 물량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건설주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2차 석유파동까지 불어 닥치게 되면서 국내 증시는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됐다.
건설주 파동은 온 나라에 불었던 투기 ‘광풍’과 함께 적절하지 못한 정부의 규제가 만들어낸 결과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강성진 전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과도한 투기 붐은 결국 잔뜩 거품만 키운 채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라며 “건설사 주가가 폭락하자 뒤늦게 뛰어든 개인 투자자들만 손실을 입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