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달자(愼達子·73)의 어머니, 故 김복련
‘일생 단 한 번/ 내게 주신 편지 한 장/ 삐뚤빼뚤한 글씨로/ 삐뚤빼뚤 살지 말라고/ 삐뚤빼뚤한 못으로/ 내 가슴을 박으셨다/ 이미 삐뚤빼뚤한 길로/ 들어선/ 이 딸의/ 삐뚤빼뚤한 인생을/ 어머니/ 제 죽음으로나 지울 수 있을까요.’ 신달자의 시 <어머니의 글씨>다. 신달자 시인의 어머니 故 김복련씨가 남긴 삐뚤빼뚤한 글씨 세 문장에는 그녀가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이 담겨 있다. <편집자주>
시인 신달자가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에게서 하얀 봉투를 건네받는다.
“네 애미가 널 위해 쓴 편지다.”
편지의 내용을 본 신씨는 여고시절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전학을 위해 고향 거창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그날 어머니가 그녀에게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버스에 탄 신씨에게 직접 만든 반찬을 건네주며 어머니 김복련씨는 이렇게 말했다. 딸 달자를 위한 이야기였지만 무엇인가 김씨 인생의 한(恨)이 서려 있는 듯했다.
“첫째,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꼭 박사 같은 거 돼라. 둘째, 내가 살다 보니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 돈도 많이 벌거라. 셋째, 이 두 가지를 이루면 네가 여자로서 꼭 행복하길 바란다.”
‘ㄱ’자도 몰랐던 어머니는 그 편지를 위해 4년을 공들였다. 받침도 틀리고, 삐뚤빼뚤한 글씨에 몇 번을 침으로 지웠는지 종이는 이미 해질 대로 해진 상태였다. 편지는 내용이나 그 상태로 보나 눈물겨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말하면 불행했던 사람이에요. 남편에게 구박을 당했거나, 부유하게 살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죠. 똑똑한 여자이고 싶었는데 자신의 신념대로 살지 못하신 겁니다.”
◇ 딸들에게 꿈을 담다
“어머니는 딸 여섯에 아들 둘을 두셨어요. 그토록 사랑하던 첫째 아들을 6·25 때 잃고 어머니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순종만 하고 살았던 어머니가 제 2의 전성기를 모색하셨던 것이죠. 하지만 뾰족하게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딸들에게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자신과는 달리 딸들을 사회에서 인정받는 당당한 여성으로 만들려고 하신 것이죠.”
한반도의 전운이 잠잠해지고 평화가 찾아올 무렵, 김씨는 고등학생인 셋째 딸부터 고향 거창을 떠나 더 큰 도시인 마산으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첫째와 둘째 딸은 이미 시집을 간 상태). 험난한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서 여자라도 더 큰 곳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뜻과 본인의 한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이 소식이 집안 어른들에게까지 전해지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른들이 집까지 찾아와 그 어린 여자 아이들을 타지로 내몰았다며 어머니를 내쫓는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거기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드려 맞을수록 강해지는 칼처럼 그녀의 뜻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렇게 셋째와 넷째 언니가 마산여고를 졸업했어요. 하지만 셋째언니는 대학 진학을 못하고 결혼을 했고, 넷째 언니는 몸이 아파 몇 년을 몸져눕는 바람에 어머니의 꿈을 이루지 못하셨죠.”
두 딸의 진학이 어려워지자 김씨는 아쉬움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기필코 딸들을 사회의 주역으로 만들겠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고스란히 다섯째 달자에게 돌아왔다. 마산은 터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에서 여고생 신씨는 부산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후 신씨는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입학하고 경남 백일장에서 1등을 하는 등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한다. 어머니 김씨의 꿈은 달자를 통해 그렇게 이뤄지는 듯했다.
“당시에는 대학교를 졸업해도 여자가 취업하기란 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무급으로 숙대 국문과 조교를 하게 됐죠. 과장 선생님이 용돈 하라고 주신 돈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어머니는 하루에 한 끼만 먹더라도 학교에 꼭 붙어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만큼 교육에 꿈이 있으셨던 것이죠.”
◇ “달자야, 네는 꼭 될 끼다”
“나가 죽어! 너 지금 그렇게 잘나가는데 왜 결혼을 하려고 하니?”
스물여섯의 앞길이 창창한 달자가 결혼을 하겠다는 소식은 김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어머니의 완강한 결혼 반대에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26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신씨. 그러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학가의 길을 포기하고 주부로서 가정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것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느낌이었을 게다. 결국 결혼 초기 제대로 먹지도 웃지도 못하고 결혼 우울증에 시달린 신씨. 문학가라는 꿈이 사라지니 그녀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가족을 통해서 어머니가 제 소식을 들으시곤 전화를 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해준 한마디가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달자야, 네는 꼭 될 끼다’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성질을 내곤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틀 뒤에 또 전화가 와서 한마디 더 하십니다. ‘그래도 네는 꼭 된다앙카나.’”
설상가상으로 1977년 남편이 쓰러지고, 시어머니까지 함께 쓰러지니 줄초상을 치를 판이었다. 두 환자를 돌보며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달자의 모습에서 어머니 김씨는 절망을 느꼈다. 이전까지만 해도 딸 달자가 어떻게든 일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남편이 쓰러진 다음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가장 불행했을 때 돌아가신 것이죠. 자식이 무엇을 이뤄내길 그토록 바라셨는데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운명을 달리한 김씨는 신씨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성공한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의 연속이었지만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로 결심했다. 빈털터리가 돼 등록금도 빌리고, 굴욕도 참아가며 공부에 매진한 결과, 1992년 신씨는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박사’라는 이름을 얻는다.
◇ 50세, 행복해지다
“박사가 되자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도 됐어요. 어머니의 소원 중 2가지를 이룬 셈이죠. 그런데 행복한 여자가 됐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약간 의문이 들더라고요.”
신씨는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과연 어머니가 말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세상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이란 단어를 새롭게 정의했다.
“‘행복이란 결국 내 현실을 껴안았을 때 오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정의했어요. 그때가 50세였는데 어머니가 1959년에 말한 그것을 모두 이뤘을 때가 된 것이죠.”
신씨는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박사가 되고 할 때마다 어머니의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는 몇 십만원의 돈을 그 옆에 묻고 이야기한다. “엄마, 이거 내가 번 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