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논어 태백(泰伯)편에 “증자 가로되 선비는 가히 넓고 굳세지 못할지니 임무는 무겁고 길은 머니라”[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는 말이 나온다. 홍의(弘毅)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센 것이다. 증자는 이어 “인을 임무로 여기니 무겁지 않겠으며, 죽은 뒤에야 그만두니 멀지 않은가”[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했다.
정조의 호 홍재(弘齋)도 알고 보니 그 말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가 1790년 화성향교(지금의 수원향교)를 옮겨 지으면서 대성전에 고유한 글[華城聖廟告由文]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30여 명에게 일일이 고하는 내용이다. 그중 종성공(宗聖公) 증삼(曾參)에게 고한 글은 이렇다. “일관의 가르침에 빨리 대답하니/공자가 군자라고 칭찬하셨지/홍재(弘齋)로 호를 삼았으니/내가 일찍이 홍의(弘毅)의 말에 종사하였네/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다스림에/대학의 팔조목과 삼강령이 있고/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으니/멀리 마음의 향을 사르네.”[一貫曰唯 子曰君子 弘以爲扁 予嘗從事 治己治人 八條三綱 道在師存 遙瓣心香]
일관의 가르침에 빨리 대답했다는 것은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나온 말이다. “삼아! 나의 도덕의 원리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라”라고 공자가 말하자 증삼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공자가 나가고 다른 제자들이 뜻을 묻자 그는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도 논어를 즐겨 읽었던 사람이다.